열반의 끝은 우주인가
불교는 인간의 삶을 고통으로 정의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중고,
탐·진·치(貪瞋癡)로 인해 반복되는 업(業)의 순환,
그리고 그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탈의 길.
나는 한동안 이 사유를 종교적 상징으로만 받아들였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이렇게 묻게 되었다.
“그럼 윤회를 벗어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열반’이라는 상태는 자아의 소멸인가, 아니면 어떤 절대적 통합인가?”
‘사자의 서(死者之書)’는 죽음 직후 영혼이 겪는 과정을 안내하는 티베트 불교의 경전이다.
그 안에는 **삶과 죽음의 중간 상태인 바르도(bardo)**에서
어떻게 하면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에 이를 수 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핵심은 단순하다.
“너의 감정, 너의 기억, 너의 집착이 너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머무르지 않는다면, 너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가르침은 곧 나에게 이렇게 들려왔다.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란,
더 이상 ‘나’라는 테두리를 유지하지 않는 상태다.”
여기서 나는 다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만약 윤회를 벗어나고, 자아가 해체된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게 되는데,
그럼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도달하게 되는 열반의 상태는 공(空)일까? 무(無)일까?
나는 그 상태를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전체와의 융합’,
즉 우주라는 순환 시스템 속으로 완전히 스며드는 상태로 받아들인다.
불교의 ‘열반’은 더 이상 물리적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그건 의식의 사라짐이 아니라
구분 짓던 모든 경계의 소멸이다.
윤회는 순환이다.
고통, 욕망, 기억, 업보의 흐름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고리를 돌며 살아간다.
그 순환에서 벗어나는 자는,
순환을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순환의 법칙을 초월하는 자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윤회의 고리를 끊은 자는
순환을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순환 그 자체가 되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믿는다.
열반은 파괴가 아닌 흡수이며,
거부가 아닌 완전한 수용이다.
도가에서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인위적 개입 없이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를 묻는 철학이다.
그리고 그 존재의 방식은 결국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흐름과 하나 되는 것’이다.
이는 열반의 상태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내가 나이기를 멈출 때,
나는 모든 것일 수 있다.”
나는 이 사유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없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어떤 윤회의 굴레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질문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똑같은 곳을 맴돌고 있지도 않다.
내 안의 ‘나’는 점점 흐려지고,
그 안에서 더 넓은 감각이 피어나고 있다.
그것이 열반의 시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