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자연과 우주, 혹은 무조건적 수용
“천지는 불인하다(天地不仁).”
이 말은 도덕경 제5장에 등장하는 짧은 구절이지만,
그 안에는 자연, 우주, 인간 존재에 대한 도가(道家)의 본질적 인식이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렇게 반응한다.
“우주는 냉혹하다는 뜻인가요?”
“자연은 인간을 배려하지 않으니, 무정하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다.
실제로, 자연은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종종 무자비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지진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생명은 예고 없이 사라진다.
모든 것은 무심하게 일어나고, 또 그렇게 끝난다.
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냉혹함의 선언’**이 아닌,
**‘절대적인 무조건적 수용의 표현’**으로 읽는다.
우리는 보통 세상을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한다.
행복, 불행, 정의, 부당함, 사랑, 고통…
이 모든 개념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 감각과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주는 그런 판단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선택’ 하지 않고, ‘차별’ 하지 않으며, ‘기대’ 하지 않는다.
바람은 죄를 묻지 않고 나무를 흔들고,
햇살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꽃을 키운다.
폭풍은 이유 없이 불고,
밤은 감정 없이 찾아온다.
이것은 무정함이 아니라, 경계 없음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기준을 우주에 투영하며 ‘냉혹하다’고 느낀다.
도덕경의 이 구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짚으로 엮은 개처럼 다룬다.”
“성인은 불인하여, 백성을 짚으로 엮은 개처럼 다룬다.”
‘짚으로 엮은 개(芻狗)’는 고대 제사에서 쓰고 나면 버려지는 제물이었다.
이는 곧 어떤 목적에 따라 잠시 쓰이고, 끝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핵심은 이거다: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용도와 감정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우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모든 존재는 평등하게 받아들여진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자비는 미소가 없다.”
“진짜 자비는 응당할 때 돕고, 응당할 때 놓는다.”
우주의 무심함은
냉소나 거절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힘이다.
즉,
우주는 감정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적으로 사랑한다.
이 물음 앞에서 나는,
내가 인간 중심적 사고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는 것을 자주 깨닫는다.
우주는 날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내 계획과 감정에 따라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답은 아마 이렇게 단순할 것이다.
“기대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있는 힘껏 살아내는 것.”
도는 말하지 않지만 말하고,
우주는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며,
진리는 의도하지 않지만 드러난다.
나는 인간이다.
기뻐하고, 아파하고, 잊고, 기대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우주의 무심함 앞에서 자주 무너진다.
하지만 그 무심함이
내 감정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정조차 **‘우주적인 흐름의 일부’**로 품어준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조금은 편안해진다.
“천지는 불인하다.”
그 말은 더 이상 냉혹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이렇게 들린다.
“우주는 그저 다 품고 있다.
사람도, 고통도, 슬픔도, 기쁨도.
심지어 나조차도.”
나는 그 안에서 사라지듯 살아가며,
매 순간 스스로를 열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아주 잠시나마 우주와 하나 되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