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 열반(涅槃), 브라흐만(ब्रह्मन्)이 말해주는 삶의 본질
삶은 언제부터 이렇게 무거워졌을까.
시간은 쫓기고, 인간은 서로에게 닫히며,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이 시대에 나는 묻고 싶었다.
"삶은 원래 이런 것일까?
혹은, 우리는 무엇인가를 잊고 있는 것 아닐까?"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세 개의 사유와 마주하게 되었다.
도가(道家), 불교, 베다(우파니샤드).
그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피어난 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서로를 향해 같은 방향으로 피어 있었다.
**도(道)**는 말한다.
『"억지로 애쓰지 마라.
도는 있는 그대로 흐르는 것이다."』
**불교의 열반(涅槃)**은 말한다.
『"고통은 '나'라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 환상을 버릴 때 비로소 고요가 온다."』
**베다의 브라흐만(梵)**은 말한다.
『"너는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네 안의 아트만은 전체와 하나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자아의 해체'를 통한 더 큰 일체성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세 목소리를 하나로 엮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요는 억제가 아니라 기억이다
사람들은 '비운다'고 하면 감정을 없애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세 전통 모두 **억제는 오히려 긴장을 낳고,
참된 비움은 '기억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ㆍ도는 자연으로 돌아감을 말하고,
ㆍ불교는 무상 속에서 원래 없었던 자아를 꿰뚫는 것을 말하며,
ㆍ브라흐만은 **'내가 곧 우주였음을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고요란 얻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그 고요였고,
세상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덧씌우며
그 본래성을 잊고 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ㆍ바쁜 회사생활 속에서,
ㆍ타인의 평가에 흔들리며,
ㆍ정체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좁은 틀 안에 가둔다.
그럴 때 도는 말해준다.
『"도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느껴지고, 흘러야 한다."』
불교는 말한다.
『"무엇을 하든,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고통에 집착하지 않는 법은 배울 수 있다."』
베다는 말한다.
『"그 모든 혼란의 이면에도, 변하지 않는 절대가 너의 안에 있다."』
이 사유들은 우리에게 '현실을 떠나 도피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무리_존재의 진실은 기억이다
나는 이제 이렇게 믿는다.
『"진리는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 내는 것이다."』
ㆍ도는 원래 내 안에 있었고,
ㆍ열반은 내 감정 속에서도 가능하며,
ㆍ브라흐만은 내가 잊고 있던 전체성이다.
이것이 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조금씩 기억해내는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