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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앳더리버 Jul 24. 2021

사랑부는 사랑을 거부합니다

사랑이라는 차별

  20살이 되어 대학 전공 공부와 교회 학교 교사를 하면서 내 삶은 조금씩 방향을 틀기시작했다. 20대 초반의 경험이야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설렘과 혼란이 공존했던 시기다. 그 전과는 다른 사회적 경험, 다양한 사람들..   20살 때 처음 갔던 장애인 시설에서의 6박7일, 교회 장애인 부서에서 한 지체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  그때 걸었던 그 길로 어느새 15년을 훌쩍 넘게 지내오고 있다.


  그 15년은 내 삶에 '장애인'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온 시기이기도 하다. 장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장애인 부서에서 장애인 지체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내 삶 속에 '장애인'은 주변인이 아닌 너무나 익숙한 존재였다. 익숙함 때문일까 가끔 장애 특성에 대한 고려를 잊고, 가르치는 학생들을 다그쳤던(?) 일은 사실 나만의 비밀이다. 익숙함은 다른 불편함도 느끼게 한다. 전국 특수교사, 특수교육과 학생들, 장애인 부서 교사들은 수도 없이 듣는 말.

"이런 일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훌륭하십니다."
"사명감없으면 정말 불가능한 일이네요."


  더 어렸을 때는 약간은 우쭐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훌륭했었나?' 닭살이 돋기도 하면서도, 아무튼 뭔가 찜찜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상대는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라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아니에요. 괜찮아요"라는 말로 가볍게 넘기곤 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고 했었나? 칭찬이 계속되면...


<훌륭한 일, 대단한 일> ,<사명감없으면 불가능한 일>


  그러고 보니, 교회 장애인 부서 이름도 보통 <사랑부>다. 얼마나 '사랑'을 강조하면 부서이름까지 그대로 사용할 정도라니. 그런데 칭찬이 계속되서 그런가 뭔가 삐딱하게 들린다. '사랑부'이름은 특별한 '사랑'이 더 필요한 부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너무 귀한 이름이다. 하지만 자칫 그 '사랑'의 개념을 우리는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훌륭한 일,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과 더불어 <장애인을 대하는 사랑부 봉사는 보통의 마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부서, 장애인을 대하는 것은 불편하니 그 일을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해석한다면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한 것일까?


  세상은 장애인, 노인, 소수자들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대할때 '보호' '배려' 강조한다. 그리고  배려를 가장 아름답게 포장한 개념으로 '사랑' 사용하곤 한다. 혹여 나도 모르게 '사랑' 적당한 배려와 동정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랑부' 부서를 특별한 '사랑' 필요한 부서로만 여기지 않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긍휼한 사랑이 필요한 부서임에 틀림없지만, 그렇지 않은 부서가 있을까? '특별한'이라는 수식어에 '나와 다른', '우리와 다른' 의미가 내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땅의 장애인뿐만 아니라 멸시받는 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연하듯 함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며 사회적 약자들을 대하셨던 예수님의 '존중'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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