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같은 기술, 곡마단 같은 기획
0. 2차대전때 T-34와 함께 활약했던 KV-1이라는 전차가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방호력과 공격력을 가진 전차가 필요하다는 전훈에서 탄생한 전차였는데, 초기에는 이 전차가 당시 유행하던 다포탑 전차로 개발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차의 초기 목업을 본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고 한다.
"동무는 어째서 전차에 백화점을 세우고 있소?"
물론 자비로운 대원수(....) 스탈린이 실제로 개발팀을 숙청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번만 더 헛짓거리 하면 시베리아 행을 직감한 개발팀은 모든 계획을 파기하고, 포탑을 하나만 가진 전차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KV-1이다.
그렇게 탄생한 KV-1은 독소전쟁 초기에 밀려오는 독일군의 진격을 여러차례 돈좌시키며 위기의 조국을 구해냈다.
1. 당시 소련의 공업생산력을 감안하면, KV-1은 잘만든 전차라고 할수는 없다. 빈약한 엔진출력으로 인해 기동성은 떨어졌고 변속기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작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며 전차장의 시야도 답답하기 짝이 없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KV-1의 목적은 밀려오는 적을 막아내고 저지하는 것이 그 주 임무였기에,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고도 남았다. 단 한대의 전차에 사단규모의 독일군이 가로막힌 적도 있고, 단 한대의 전차를 제거하기 위해 포병의 사격을 퍼부은 일도 있으며, 7.5cm 대전차포로도 안돼서 8.8cm 포까지 끌고와 두들기면 그대로 전차를 길막해버리고 승무원은 도주한 일도 있다.
KV-1은 목적에 맞는 일을 해냈다.
2. "목적에 맞게" 하다보면 뭔가 점점 비대해질때가 있다. 그것이 기획이든 개발이든 그렇다. 달성해야 하는 과제가 거대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사례가 독일에도 있다. 포탄이 떨어지고 공병이 달려들며 하늘에서는 폭격기가 내리꽂히는 전장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은 티거와 티거2를 만들었다. 전차 개개의 성능은 당연히 소련의 KV-1이나 T-34보다 티거가 더 위다. 하지만 그런 우월한 전차를 가지고도 독일은 전쟁에서 졌다. 아무리 강력한 전차라도, "포탄이 떨어지고 공병이 달려들며 하늘에서는 폭격기가 내리꽂히는 전장"에서는 버티기 힘들다. 당연히 부서지고 고장난다. 독일제 전차는 비싸서 부서지면 보충하기도 어렵다. 너무 무거워서 고장나면 버릴수밖에 없다.
3. 이 균형의 정점에 존재하는것이 T-34와 M-4 셔먼이었다. 전차 개별적인 성능은 분명 KV-1이나 티거보다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을 상쇄할수 있는 기동력이란 장점이 있었고, 무엇보다 저렴하고 상대적으로 가벼워서 보충하기에도 수리하기에도 좋다. 심지어 T-34는 적의 포탄이 공장에 떨어져 내리는데도 만들어져 싸우러 나갔다.
이런 사례를 보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무기는 "최강의 무기"가 아닌 "균형있게 목적을 달성하는 무기"가 아닌가 싶다.
4. 기획이나 개발에 있어 과도한 케이스를 종종본다. 그런 현상에 어떤 단어를 붙일까 고민했는데, "서커스 같은 기술", "곡마단 같은 기획"이라고 붙이면 어떨까 싶다.
겉보기엔 현란하지만 일상에서 내가 싸울때 쓰기엔 필요도 없고 무리하기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