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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emin Park Jun 11. 2019

플랫폼리스,
"왕국은 있는데 왕이 없다"

미디어 블록체인이 그리는 미래, 플랫폼리스 (1) 

플랫폼리스, 플랫폼 사업자 없는 플랫폼


블록체인에서는 트러스트리스(trustless)라는 용어가 있다. 직역하면 ‘무신뢰의’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신뢰를 보증하는 중앙화된 기관이 따로 필요없다는 뜻이다. 기술에 의존해 신뢰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개념들이 더 있다. 서버 운영에 필요한 기능은 있지만 서버는 만들 필요가 없고(serverless), 상태를 저장하지 않으면서 상태 변화를 처리할 수 있고(stateless), 브랜드를 없앰으로써 제품의 가치를 직접 전달하듯이(brandless), 트러스트리스는 신뢰를 만드는 중앙 기관 없이 신뢰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필자는 미디어 블록체인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플랫폼리스(platformless)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플랫폼리스는 미디어 블록체인에만 해당되는 개념은 아니고 탈중앙화된 블록체인 전체에 적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플랫폼리스는 미디어 블록체인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개념으로 생각된다. 즉 미디어 블록체인은 가장 강력한 플랫폼리스 기술이다. 


플랫폼리스는 플랫폼은 있지만 플랫폼 사업자가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플랫폼리스는 플랫폼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왕국은 있는데 왕은 없다”. 즉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는 없지만 미디어 플랫폼은 있다. 화폐는 있는데 화폐 발행 기관은 없다. 게임은 있는데 게임사는 없다. 아마존이라는 서비스는 있는데 아마존이라는 회사는 없다. 배달의민족이라는 서비스는 있는데 우아한형제는 없다.


플랫폼리스 시대에는 콘텐츠가 아니라 플랫폼이 공짜인 시대가 된다. 플랫폼 사업자가 없으므로 플랫폼 사업자가 떼어가는 수수료도 없다. 물론 이전에도 광고만 받고 수수료를 받지 않는 플랫폼 사업자가 있었다.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들은 자신들의 CMS(content management system)와 저장 공간, 퍼블리싱 시스템을 쓰는 콘텐츠 생산자들에게 수수료를 한 푼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광고비도 나눠 준다. 많은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가 사용자에게 구독료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광고 사업을 하는 기존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는 수수료를 받는 셈이었다. 콘텐츠 생산자에게는 광고비로 준 돈에서 각종 개발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이, 사용자에게는 사용자의 관심과 큐레이션을 통한 그림자 노동이 수수료를 대신했다. 수수료가 없었다면,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는 초과 이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이익을 전액 재투자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아마존도 다르지 않다. 애플이, 아마존이, 구글이 성장해서, 중개를 통한 초과 이익을 가져가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이는 누구인가? 개발자인가? 콘텐츠 생산자인가? 사용자인가? 아니다. 주주다. 플랫폼리스 기술은 주주가 가져간 이익을 콘텐츠 생산자와 사용자에게 돌려준다. 



콘텐츠 생산자가 플랫폼리스 플랫폼을 개발한다


현재는 미디어 플랫폼이 광고주로부터 클릭당 광고료를 10원 받는다고 하자. 이중 콘텐츠 생산자에게 1원을 주고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는 나머지 9원을 가져간다. 사용자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는다. 미디어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플랫폼리스를 달성한다면, 플랫폼 사업자가 가져가던 9원을 콘텐츠 생산자와 사용자에게 다시 배분할 수 있다. 예컨대 콘텐츠 생산자가 9원을 가져가고 사용자에게 1원을 줄 수 있다. 


물론 미디어 플랫폼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가 개발하고 운영하고 개선한 것이다. 그런데 그 비용이 9원은 아니다.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의 이윤율을 50%라고 하자. 즉 높은 인건비와 공짜 점심,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한 사옥, 각종 복지 시설과 개발비 등 각종 비용으로 클릭당 4원을 쓰고 나머지 5원을 이익으로 가져간다는 뜻이다. 미디어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플랫폼리스를 달성한다면, 플랫폼 사업자가 이익으로 가져가던 이 5원을 콘텐츠 생산자는 물론 사용자에게 배분할 수 있다. 


예컨대 콘텐츠 생산자가 5원을, 사용자가 1원을, 개발 및 관리를 맡은 별도의 개발자가 4원을 가져가는 방식을 생각할 수도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스팀처럼 초기 개발자가 선 채굴 등의 형식으로 개발비를 먼저 떼어가고, 이후에는 콘텐츠 생산자가 55%를, 사용자가 20%를, 운영자 역할의 증인이 10%를, 장기 투자자가 15%를 가져가게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어떤 이익 배분이 적합한가 하는 문제는 무엇보다 누가 플랫폼을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여기서 미디어 블록체인의 미션을 명확히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 블록체인은 대항품행으로 드러난 기존 미디어 플랫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플랫폼리스 미디어 블록체인은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가 쥐고 있던 헤게모니를 콘텐츠 생산자와 사용자에게 돌려주고자 한다. 즉 콘텐츠 생산자와 사용자를 위한, 이들에 의한, 이들의 미디어 플랫폼을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이긴 하지만 콘텐츠 생산자가 자신의 콘텐츠에 최적화된 플랫폼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콘텐츠 생산자가 개발자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콘텐츠 생산자가 직접 플랫폼을 만들면서 플랫폼이 아닌 콘텐츠 생산을 통해 돈을 버는 모형은 실은 신문사나 방송사, 그리고 영화 제작사에게 가장 익숙한 모형이었다. 인쇄기, 방송시설, 영화관 기술이 어려웠을 때 비쌌을 때 제작과 유통을 수직계열화하는 식으로 독점해 비용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원칙적으로 미디어 블록체인의 플랫폼리스 특성은 콘텐츠 생산자가 플랫폼 사업자에게 뺏겼던 지위를 되찾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과거로의 회귀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 지금의 언론사가 미디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플랫폼리스를 구현하고 지금의 IT 기반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를 대체하기를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기술적인 문제도 있을뿐더러, 언론사는 탈중앙화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전통 미디어는 원칙적으로 자사의 콘텐츠만 노출했다. 통신사의 기사를 재전송할 때도, 외주 제작사의 드라마를 방영할 때도, 자사의 오리지널 콘텐츠처럼 내보내려 한다. 


스스로 재료를 만드는 미술가처럼 플랫폼리스 생태계의 위대한 콘텐츠 생산자는 자신의 콘텐츠 양식을 가장 잘 표현할 플랫폼을 함께 설계한다. 직접 개발자가 되거나 내부 개발자를 쓸 수도 있고 외부 개발사에 위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콘텐츠를 만들 다른 생산자들을 끌어들이고, 그 콘텐츠에 열광해줄 사용자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더 많은 좋은 콘텐츠가 모이면 더 많은 사용자가 찾아오고, 더 많은 사용자가 찾아오면 자신들이 만든 콘텐츠도 더 많이 유통될 것이다. 플랫폼 사업자가 만든 플랫폼과 달리 콘텐츠 생산자가 만든 플랫폼에서는 콘텐츠 생산자가 콘텐츠 품질 관리에 직접 나선다.


미디어 블록체인에서 돈을 버는 이들은 그 생태계를 가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돈을 번다. 핵심 개발팀도 마찬가지다. 개발비 이상의 초과 이익을 가져갈 수는 없다. 예컨대 스팀 개발팀이 스팀 개발로 부자가 되는 건 미디어 블록체인 프로젝트답지 않다. 스팀의 가치, 즉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큐레이션함으로써만 돈을 벌어야 맞다. 그러나 개발자가 초과이윤은 가져가지 않더라도 충분한 이익을 배정할 수는 있다. 미디어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개발자 집단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이는 바로 해당 플랫폼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최고의 콘텐츠 생산자가 될 것이다. 


플랫폼리스 미디어 블록체인에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는 없다. 콘텐츠 생산자는 미디어 블록체인 플랫폼을 만든 뒤에는 빠져나와야 한다. 즉 수수료를 없애고, 탈중앙화 거버넌스에 따라야 한다. 중앙화된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가 되어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려 한다면, 이미 시장을 선점한 중앙화된 미디어 플랫폼을 이기기도 힘들고, 탈중앙화의 기치 아래 모인 콘텐츠 생산자와 사용자도 떠나고 말 것이다. 


플랫폼을 최초로 만드는데 기여한 콘텐츠 생산자가 플랫폼 사업자로서 초과이익을 가져가지는 못해도, 선도자의 우위는 가질 수 있다. 플랫폼을 가장 잘 알고 그 플랫폼에 맞는 콘텐츠를 가장 잘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복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양식으로 최고의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자가 그런 콘텐츠에 최적화되고 커스터마이징된 플랫폼을 만들고 그 콘텐츠를 팔아 그 플랫폼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가져갈 수 있다. 플랫폼이 확장 가능성이 있다면, 다른 콘텐츠 생산자들 역시 이 성공적인 고유 양식의 콘텐츠 생산의 패스트팔로어가 되기 위해 이 플랫폼에 최대한 빨리 합류하려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플랫폼리스 미디어 블록체인은 우아한 형제 없는 배민찬과 같다. 반찬가게가 입점해 있는 배민찬 앱에서 우아한형제들에 해당하는 사업자가 없어서 수수료는 물론 광고도 없다. 대신 이 플랫폼리스 반찬가게 플랫폼에서는 최고의 반찬가게가 돈을 번다. 최고의 반찬가게가 개발자를 지원하고 다른 반찬가게를 모으고 사용자를 모은다. 돈을 버는 반찬가게는 생태계에 기여한 만큼 돈을 벌 것이다. 



콘텐츠와 플랫폼의 연쇄 폭발


특이점(singularty)이란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시점을 뜻한다(Kurzweil, 2006/2007). 특이점을 넘어서면 지능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능 폭발(intelligence explosion),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트랜스 휴먼(trans human)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술이 그런 식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 해당 기술은 보편 서비스가 되면서 공기가 된다. 기술이 완전해짐으로써 기술은 싸지고 사라진다. 그 덕분에 초지능과 트랜스 휴먼이 등장한다. 


굳이 특이점을 지나야만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인공지능은 물론 IT 인프라 기술도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젠슨 황(Jensen Huang)은 엔비디아 GTC 2017에서 개인용 슈퍼컴퓨터 시대를 선언했다. 


15기가바이트(GB)나 되는 UHD 영화를 6초 안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 5세대 이동통신(5G) 상용화도 2019년으로 다가왔다. 파이썬 같은 쉬운 프로그래밍 언어도 널리 보급됐다. 깃허브(github)를 이용해 코딩을 쉽게 할 수 있게 됐다. 이더리움의 경우 솔리디티(solidity)를 이용해 간편하게 스마트 컨트랙트를 구현할 수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는 다양한 인공지능 기능을 간단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플랫폼 기술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개인들도 블로그를 만들듯이 누구나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을 만들게 될 것이다. 수십억 명의 플랫폼리스 미디어 블록체인 네이티브가 등장할 수도 있다. 플랫폼은 공기가 되면서 공짜가 될 것이다. 


단 하나만 뚫고 나가면 댐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 블록체인은 정확히 아마존과 구글을 겨냥하고 있다. 개인들도 블로그를 만들 듯 플랫폼을 만들 때가 되면, 수수료가 제로가 된다. 그 결과 영원하리라 믿었던 아마존이, 구글이, 네이버가, 플랫폼 사업자라 부르던 모든 이들이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 대신 콘텐츠 생산자들이 특화된 플랫폼을 대거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미디어 블록체인은 미디어 스타트업을 위한 기술이다. 기존에는 미디어 스타트업은 네이버냐 페이스북이냐 유튜브냐 인스타그램이냐에 따라, 즉 플랫폼 양식에 따라 콘텐츠의 양식을 맞춰야 했다.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지만 플랫폼에 최적화되지 않으면 유통조차 안될 것이다. 플랫폼 사업자는 자신의 플랫폼 양식에 맞는 콘텐츠 생산자에게만 투자한다. 콘텐츠 생산자는 결국 플랫폼 사업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플랫폼 사업자가 양식 내 독점을 달성하면 플랫폼 사업자는 수수료를 높인다. 높은 수수료 때문에 미디어 스타트업은 BM(business model)을 만들기 어렵게 된다. 수수료 이하의 소액 결제는 손해가 된다. 


그러나 플랫폼리스의 시대는 창작자가 되려면 콘텐츠만이 아니라 플랫폼을 먼저 만드는 시대, 최고의 작가가 최고의 플랫폼이 되는 시대다. 책을 쓰려면 글 이전에 책을 먼저 만드는 시대가 온다. 앱을 만드는 것은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고,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고유한 양식을 개척하는 것이고, 고유한 양식을 개척하는 것은 반복 가능한 양식을 가진 콘텐츠와 그 콘텐츠를 잘 드러내는 플랫폼과, 그 플랫폼에 참여할 다른 콘텐츠 생산자와 그 콘텐츠를 즐기는 사용자를 모으는 일이 된다. 개발하는 콘텐츠 생산자는 마블, 루카스필름, 픽사 등 제작사를 여럿 가진 디즈니라기 보단,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오큘러스, 메신저 등등 양식 분화된 플랫폼을 더 많이 가진 페이스북에 가까울 것이다. 미래의 넷플릭스는 넷플릭스가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사가 넷플릭스를 개발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양식 간 플랫폼 경쟁도 심화된다. 이에 따라 양식 내 독점을 위한 플랫폼의 양식 분화, 그리고 콘텐츠의 양식 분화도 가속화된다. 예컨대 만화 플랫폼은 만화가가 만든다. 만화 플랫폼은 순정 만화가가 만든 순정만화 플랫폼, 순정만화 이모티콘 제작자가 만든 순정만화 이모티콘 플랫폼 등으로 세분화된다. 세부 플랫폼 간에 수직적이거나(예컨대 여러 만화 플랫폼의 메타 플랫폼), 수평적인 확장(예컨대 만화 관련 상품 쇼핑몰)이 있을 수 있지만, 확장된 플랫폼 역시 하나의 세분화된 플랫폼으로 기능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미디어 블록체인의 시대에는 거대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가 사라지는 대신 양식별로 차별화된 홈페이지 수만큼 많은 콘텐츠와 플랫폼이 대거 등장할 것이다. 개별 플랫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저작권 중심의BM을 바탕으로 유지된다. 각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암호화폐는 생태계의 독립성을 지키는 경제적 무기가 된다. 플랫폼들은 작게 시작해서 가치를 키운 뒤 인터체인 프로젝트를 통해 연합하면서 규모를 달성해간다. 지능 폭발은 플랫폼리스 미디어 블록체인을 통한 콘텐츠와 플랫폼의 연쇄 폭발 형태로 시작될지 모른다. 



이 글은 박대민, 명승은이 2018년 공저한 <미디어 블록체인, 플랫폼리스의 기술>에서 분량 문제로 빠진 부분 등을 보완한 것이다. 아래는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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