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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elboso Aug 06. 2020

[플랜트 산업 쉽게 접근하기] 국제 유가 #2-1

석유 시장의 역사 (상)

지난 첫 번째 글에서는 유가와 관련된 용어 설명과 함께 1차, 2차 석유파동에 의해 원유선물거래 시장이 탄생됐다는 내용에 대해 말씀 드렸었습니다. 오늘 이어지는 글에서는 석유파동이 일어났던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유가에 영향을 준 세계사적 사건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왜 유가가 영향을 받았는지 제가 이해했던 쉬운 글로 공유하겠습니다. 


우선, 사건의 시작인 1973년 1차 석유파동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https://www.npr.org/sections/pictureshow

1973 - 1차 석유파동

1973년은 1948년 이스라엘 성립 이후 1973년까지 4차례에 걸쳐서 진행된 중동전쟁의 마지막 4차 전쟁이 있었던 해입니다. “라마단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4차 중동전쟁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3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에 계속 패배했던 아랍국가들 중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선빵(?)을 치면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라마단 전쟁이 1차 석유파동을 발생시킨 배경은 OPEC이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동은 석유를 채굴할 기술이 없었고, 그래서 석유 채굴을 위해 우리가 oil major라고 부르는 거대 자본들에게 채굴권 (“석유이권”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습니다)을 주고 수입을 얻었습니다. 


OPEC은 석유이권 수입의 인상을 70년대 초반부터 추진중이었는데, 라마단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면서 석유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발표가 1차 석유파동의 시작이었습니다.


OPEC은 이듬해인 74년 1월에 배럴당 5.1달러에서 11.6달러로 인상한 것을 비롯하여, 1973년 10월에 라마단 전쟁이 발발한 후, 겨우 3개월만에 유가를 3배 넘게 상승시켰습니다 (1974년 1년 동안 4배 상승했습니다). Oil major가 쥐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이 1차 석유파동에 의해 OPEC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입니다.


생산활동에 필수적인 석유가 부족해지고 가격이 폭등하면서, 제품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고, 제품 가격이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동시에 (경제학자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찾아왔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 가릴 것 없는 세계적인 불황이었습니다. 

출처: https://www.npr.org/sections/pictureshow

1978 - 2차 석유파동

1차 석유파동으로 OPEC이 석유 시장의 권력을 쥐게 되었지만, 엄청났던 인플레이션을 고려했을 때는 원유가격이 상승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OPEC은 1978년 12월 유가를 다시 올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와 거의 같은 시점에, 1978년 시작된 이란의 (부패한 국왕독재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게 된) “이슬람혁명”은 유혈폭동사태로 번지게 되고, 세계에서 2번째로 석유를 많이 수출하던 이란이 석유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면서 2차 석유파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했습니다.


뒤 이어 1980년에는 국경문제에 의해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터지면서 유가는 20달러선에서  30달러로 폭등했고, 1981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유럽이나 미국의 제재에 대항할 목적 혹은 다른 국가들을 압박할 수단으로 “석유를 무기화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유가는 40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전 세계는 또 다시 경기침체에 빠지게 되었는데,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이 피해를 입은 모습이 1차 석유파동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1차 석유파동 당시 선진국들은 주요 사업이 중화학공업이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우리 나라와 같은 개도국은 충화학공업을 처음으로 육성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1차 석유파동에 의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차 석유파동 때는 중화학공업이 점차 활성화된 개도국들이 큰 피해를 입은 반면, 1차 석유파동 후 대응책을 준비하던 선진국들은 중화학공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산업 전환에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비교적 완화된 충격을 받았습니다. 2차 석유파동 당시 물가를 비교해 봐도, “선진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 10.3% vs 개발도상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 32.0%”로 개발도상국이 훨씬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참고로 우리 나라는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보인 적이 딱 두 번인데, 한 번은 IMF 다른 한 번이 2차 석유파동이라고 합니다.


1985~1995 – 사우디 증산, 걸프전, 장기 저유가 시대

2차 석유파동에 의해 폭등했던 유가는 30달러대를 유지하다가, 80년대 중반에 반 토막 났습니다. 시장점유율을 높이려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증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90년대 내내 저유가 시장이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1997_Asian_financial_crisis


1997 - 아시아 금융위기

90년대 내내 이어지던 장기 저유가 시대는 1997년이 되면서 바닥 아래로 한 번 더 떨어집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는 우리 나라의 IMF 사태, 그리고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원인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지면서 아시아의 경제와 산업이 멈췄고, 당연히 석유 수요가 떨어지면서 유가도 급락했습니다. 


1999 - OPEC 감산합의

말도 안되는 속도로 IMF를 조기 졸업한 대한민국을 필두로, 1999년 즈음 아시아의 경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석유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1997년 이후 지속적인 유가 하락에 의해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던 OPEC 가입국들은 1999년 1년 간 석유 생산을 줄이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 경기 회복에 OPEC의 감산 결정이 덧붙여지면서, 유가가 2배 이상 큰 폭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습니다. (더 쓰고 싶지만 끝까지 안 읽어 주실 것 같아서..) 2000년대 이후의 석유 시장의 역사는 다음 주에 전달 드리겠습니다.


즐거운 한 주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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