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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elboso Jan 21. 2021

[플랜트 산업 쉽게 접근하기] 석유 산업의 역사 -2

#2. 석유 패권 시대의 시작

1910년대부터 석유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시 시작하고 석유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빅 3(뉴저지 스탠다드, 로열 더치 셸, APOC)를 비롯한 거대 석유 기업들은 석유 산업의 패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마치 마피아 같은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석유가 소비자의 수요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비정상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하여 통제하려고 했던 이유는 중동이 석유의 생산지로 새롭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중동의 가치가 높아진 역사적 배경부터 전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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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생산 기지로서의 중동의 가치 (1908~)


중동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된 1908년입니다. 사실 1908년 이전의 중동은 유럽의 안중에도 없던 땅입니다. 중동(Middle East)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유럽과 가깝고 많은 영향을 미치던 근동(Near East, 당시 오스만 제국이었던 터키 등)과 19세기부터 유럽의 열강들이 탐욕적인 관심을 갖던 극동(Far East) 사이의 지역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게 관심 없던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힘 있는 유럽 국가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란 테헤란에 위치한 APOC 사옥. 현재는 이란의 외교부 청사


가장 먼저 중동의 가치에 눈을 뜬 나라는 영국입니다. 1901년에 영국의 광산업자가 이란 정부로부터 석유개발권을 획득하고 오랜 탐사 끝에 1908년 이란 남부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만들어진 회사가 빅 3중의 하나인 APOC(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 Anglo-Persian Oil Company, 현재 BP)이며,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1913년에 영국 정부의 소유가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결정한 중동의 운명 (1916 ~ 1920)


석유를 향한 영국의 욕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지들 마음대로 중동을 쪼개서 종전 후의 이익을 미리 확보하려 했습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었던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의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 (François Marie Denis Georges-Picot)가 전쟁이 끝난 후 중동 지역의 영토 문제를 미리 결정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나서 오스만 제국(터키)의 아라비아 반도와 아랍지역을 입맛에 맞게 나누어 갖기로 합의한 비밀 협약입니다. 지금까지 중동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가 이때 중동 위에 그려 놓은 선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입맛대로 그어 놓은 중동 지역의 경계선 https://www.dw.com/en/sykes-picot-drew-middle-easts-arbitrary-borders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중동 공략을 시작한 영국은 철저하게 중동 지역의 석유를 혼자 처먹기 위해 중동 전역에 10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을 주둔시키며 페르시아만을 완전하게 장악합니다. 그리고 1920년 영국은 연합국들이 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을 나눠 먹기 위해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열린 연합국 최고회의에서 산레모 협정(San Remo Agreement)을 통해 중동 지역 석유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산레모 협정을 위해 모인 각국의 대표들


산레모 협정(San Remo Agreement)의 핵심은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나눠 먹기입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중동을 분할하여 먹기로 합의한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리에 체결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문제가 되기 전 졸속으로 산레모 협정을 맺어서 본인들의 이권을 확실하게 챙기려고 했습니다. 산레모 협정을 통해 승전국들이 (전쟁에 사용된 석유의 90%를 제공한 미국을 제외하고) 오스만 제국을 8개로 나눴지만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몫이었습니다. 영국은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 지역에 깃발을 꽂았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차지했습니다. 영국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권을 챙겼지만, 영국이 개발하는 석유 지분의 25% 및 독일이 갖고 있던 터키의 석유회사 지분 25% 를 프랑스에 넘기는 조건으로 합의했습니다. 후에 산레모 협정은 세브르 조약으로 확정됩니다.


석유 패권의 이동 (1927~)


승전국들의 중동 나눠 먹기에 초대받지 못한 미국은 산레모 협정이 베르사유 종전 조약 (전승 연합국 간 평등한 권리를 부여한다) 위배라며 분개했습니다. 미국이 날뛴 덕분인지, 1927년 이라크 북동부의 키르쿠크 유전 개발 사업부터 참여하게 되고, IPC(이라크 석유 회사, Iraq Petroleum Company, 최초 설립은 영국과 독일 자본에 의해 터키 석유회사(TPC)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나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독일 지분이 프랑스에 넘어갔습니다)의 지분 약 24%를 미국 회사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우디 유전 발굴권을 독점적으로 따내고 1933년부터 사우디의 유전을 탐사하기 시작했던 미국의 소칼(SOCAL, 현재 Chevron)이 1938년 사우디의 동부에서 대규모의 유전을 발견하고, 1939년부터 하루 50만 배럴씩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사우디의 석유를 독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석유 기업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 산업을 독점할 수 있게 된 계기, 또 석유 패권이 미국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빅 3, 칠자매라고 불리는 초대형 글로벌 석유기업들이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카르텔을 형성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카르텔의 시작 (1928~1973)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를 축적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독점입니다. 시장에서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신규업체의 진입을 막고 공급과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는 독점의 폐해 때문에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독점을 강하게 규제합니다.


석유 산업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된, 후에 칠자매(Seven Sisters)라고 불리게 된 초대형 석규 기업들은 정부의 독점 규제를 뚫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어마무시한 부를 쌓기 위해 두 개의 협정을 맺으면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레드라인 협정 (Red Line Agreement)과 현상유지 협정(As Is Agreement)이라고도 불리는 아크나캐리 협정(Achnacarry Agreement)입니다.


레드라인 협정 (Red Line Agreement) – (1928.7)

20세기 초반까지 석유 산업에 파이프를 꽂고 시장을 이끄는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였습니다. 세 국가는 본인들이 아닌 다른 국가가 중동의 석유 매장 지역에 뛰어들어 부를 나눠 먹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28년 이란과 쿠웨이트를 제외한 중동의 주요 산출국(현재 터키, 시리아, 이라크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 전체)에 빨간색 선을 그어서 그들의 허락 없이는 절대 선을 넘을 수 없는 레드라인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레드라인 협정은 위에 석유 패권의 이동에서 말씀드린, IPC(이라크 석유 회사)에 참여한 업체들 사이의 협정입니다. 영국의 APOC (현재 BP), 로열 더치 셸 (현재 Shell), 미국의 뉴저지 스탠다드 (후에 엑손, 현재 ExxonMobil), 소코니 (후에 모빌, 현재 ExxonMobil), 걸프, 텍사코 (걸프와 텍사코는 후에 캘리포니아스탠드에 인수합병, 현재는 Chevron), 프랑스의 CFP (Compagnie Française des Pétroles, 현재 TOTAL), 그리고 IPC의 전신인 터키 석유 회사를 설립한 아르메니아계 영국인인 걸벤키안(Calouste Gulbenkian)에 의해서 그려졌습니다.


석유 열강이 그어 놓은 붉은 선


위에 열거한 협정 참여 회사들은 유가를 통제하기 위해 중동지역에서의 신규 유전 개발은 공동개발 (Consortium) 형태로만 진행하고, 각 기업의 개별적인 석유 탐사 및 생산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야 석유의 과잉 생산을 막을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협정에 참여한 업체를 제외하고 그 어떤 세력도 아라비아 반도에 그려진 붉은 선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아크나캐리 협정(Achnacarry Agreement) – (1928.8)

구소련의 원유가 시장에 풀리고, 1920년대부터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 중남미에서 석유 생산이 시작되면서 공급과잉에 의해 석유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했습니다. 협잡꾼처럼 쌓아 올린 부가 무너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뉴저지 스탠다드, 로열 더치 셸, APOC 등 빅 3의 주인들은 1928년 8월 석유 가격을 입맛에 맞게 통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아크나캐리 고성에 꿩 사냥을 핑계로 비밀리에 모여 아크나캐리 협정을 체결합니다. 

아크나캐리 협정이 체결된, 스코틀랜드의 아크나캐리 고성


뉴저지 스탠다드, 로열 더치 셸, APOC는 현상 유지 협정(As Is Agreement)으로 더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7개의 항에 합의합니다.

협정 참여자의 시장 점유율을 현재와 같이 유지한다. (석유 생산량을 현재 수준으로 동결)- '현상 유지' 

석유 운반선과 정유공장 등 석유 관련 시설을 협정 참여자들 간 공동 사용할 수 있지만, 소유주에게는 실제 비용보다 적은 비용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 

시장에서 증가된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실제로 필요한 경우에만 새로운 생산 시설을 추가한다. 

협정 참여자는 각 생산 지역에 대한 지리적 위치의 현재 재정적 이점을 유지한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협정 참여자의 생산 공장으로부터 원유를 구매해야 하며 제 3자로부터의 원유 구매는 금지한다. 

특정 지역에서 생산된 잉여 원유가 다른 지역에 유통되어 가격 구조를 혼란시키는 것을 방지한다. (잉여 원유는 약정된 가격에 협정 참여자에게만 판매) 

이러한 원칙을 준수하면 업계뿐만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된다.


빅 3의 아크나캐리 협정 체결 후에, 미국의 뉴욕 스탠다드 오일과 걸프도 참여하면서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까지 이어지는 5개 석유 메이저 업체 간의 카르텔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움직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2년 이후 해외 시장을 몇 개 구역으로 쪼개서 각 지역에서의 생산량을 할당하고 유가를 결정했습니다. 

추가 증산은 수요 증가가 있을 때만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빅 5의 최고 경영진은 매달 모여 각 회사가 할당된 생산량을 준수했는지 점검하고 향후 계획을 세웠습니다. 

카르텔 회원사 간에는 석유를 할인된 가격에 장기 공급하는 계약도 맺었습니다.  

잠재 경쟁자가 석유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로 원유 매장 지역을 공동으로 매입했습니다. 


즉, 빅 5라고 불리는 아크나캐리 협정 참여자들은 협정 체결 이후 1차 석유파동 전까지 담함과 독점으로 석유 시장을 지배하며 석유의 공급과 가격을 통제한, 석유 패권 시대의 주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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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석유의 메카로 부상한 중동, 1차 세계대전이 중동과 석유 산업에 미친 영향, 그리고 석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들의 움직임에 대해 전달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는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사우디 아람코의 탄생과 함께 미국이 어떻게 석유 패권을 손에 쥐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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