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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elboso Jan 14. 2021

[플랜트 산업 쉽게 접근하기] 석유 산업의 역사 -1

#1. 석유 산업의 태동과 성장 

작년 8월, 브런치를 처음 시작하고 국제 유가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달드리면서, 1970년대 이후의 석유 시장의 역사를 유가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작성한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70년대 이전 석유 산업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면 석유 산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을 간략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석유 산업의 태동부터 1970년대 이전까지의 석유 산업의 역사를 전달해 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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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산업의 태동 (1859)


석유 산업은 1859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석유를 대규모로 채굴하는 데 성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휘발유가 연료로 사용되기 전인 당시에는 (휘발유 자동차는 1885년 칼 벤츠가 발명했습니다) 석유가 조명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는데, 수요도 받쳐주지 못하고 석유 생산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공급 과잉에 의한 가격 폭락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석유 산업이 계속 이어지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석유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유명한 석유왕,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입니다. 록펠러는 정유 공장과 유통 과정을 장악해서 공급을 줄이는 방법으로 석유 공급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


1865년 미국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설립하고, 1871년 열차 회사와 담합으로 석유 화물 요금을 할인받았습니다. 공급 과잉으로 석유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에서 유통 비용을 낮춰 경쟁력을 갖춘 록펠러는 경쟁사들의 정유공장을 마구 주워 담았고 아주 빠른 시간에 클리블랜드(당시 석유산업의 중심이었다고 합니다)의 정유소 26개 중 20개를 합병했습니다. 첫 정유소 설립 후 10년이 지난 1875년, 록펠러는 미국 전체 정유 공장의 95%를 삼킨 거대 기업이 됩니다.


록펠러의 회사(오하이오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대리점을 통해 유럽 시장 및 세계 시장을 장악한 후, 1870년대 후반부터 석유의 가격을 대폭 인상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1882년 미국 내 40여 개의 독립적인 기업들을 하나로 모은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를 설립하며 20세기까지 이어진 석유패권 시대의 창시자가 됩니다.


빅 3 체제의 완성 (1873 ~ 1913)


어마어마한 돈이 보이는 싸움에 유럽도 질 수 없었습니다. 스웨덴의 로버트 노벨(Robert Nobel,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노벨상을 유언으로 남긴 Alfred Bernhard Nobel의 형제)은 1873년 브라노벨(Branobel)을 설립하고 러시아 아제르바이잔에서 유전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로버트 노벨의 브라노벨이 개발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u) 유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당시 유럽인들이 동인도제도라고 부르던)에서는 네덜란드의 로열 더치(Royal Dutch)가 유전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동아시아 유통망을 가진 유대계 영국인 마커스 사무엘(Marcus Samuel)의 쉘(Shell), 그리고 세계 최대의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투자에 참여하면서 1907년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이 출범했습니다. 즉, 네덜란드의 로열 더치가 원유를 생산하고, 영국의 무역상인 마커스 사무엘이 유통,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 자본을 대는 유럽계 거대 석유기업이 등장한 것입니다. 


영국 정부도 가세했습니다. 1882년, 영국 해군이 석탄을 떼는 전함보다 석유 연료 전함의 전투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영국 정부는 군사적 목적 등의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해군부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주도 하에 석유 산업에 진출합니다. 영국 정부는 1913년 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APOC, Anglo-Persian Oil Company, 나중에 BP가 됩니다)의 주식 51%를 인수하면서 APOC의 주인이 됩니다.


영국 정부를 등에 업은 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 원유 채굴 -> 정유 -> 유통까지 포괄하는 최초의 통합적인 석유 기업인 로열 더치 셸, 정유와 유통에 한정되어 있지만, 미국 시장을 거의 다 먹은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 이렇게 그 당시 글로벌 석유 산업의 빅 3 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록펠러의 몰락 (1890~1911)


미국 석유 시장을 장악한 후에 공급과 가격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은 독점행위에 대한 극심한 비판 여론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오하이오 주정부는 반독점법을 제정하고 1890년 스탠다드 오일에 대한 독점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스탠다드 오일은 본사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뉴저지로 이전하면서 반독점법을 피해 갔습니다. 


그 당시 스탠다드 오일은 그대로 두면 미국마저 삼킬 수 있는, 미국 연방정부보다 힘이 쎈 초국가적 존재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막강했습니다. 당연히 록펠러를 싫어하는 세력이 많았는데,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34개 회사로 쪼개진 스탠다드 오일, https://www.visualcapitalist.com/chart-evolution-standard-oil/


사실, 록펠러는 더 오랜 시간의 전성기를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록펠러와 같은 지역(오하이오) 출신이고 록펠러를 지지하던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미국의 25대 대통령으로 재선까지 당선되었거든요. 하지만 매킨리는 당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면서, 부통령이던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었고, 석유로 미국을 통제하는 록펠러가 꼴 보기 싫었던 루스벨트는 반독점법을 앞세워 1905년부터 연방정부 차원에서 스탠다드 오일에 대한 독점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미국 정부는 1911년 스탠다드 오일을 34개 회사로 쪼개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석유왕 록펠러는 재위에서 내려옵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석유 공급 (1910 ~ 1927)


록펠러가 힘을 잃었다고 석유 산업도 힘이 빠진 것은 아닙니다. 1885년 벤츠의 휘발유 자동차 발명, 1908년 포드 모델 T 출시로 자동차 연료인 가솔린의 수요가 급등하면서 1910년에는 가솔린 수요가 조명에 쓰이던 등유의 수요를 추월했습니다. 등록되는 자동차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가솔린 소비도 1925년에는 2억 2390만 배럴로 1918년 대비 약 3배 증가하는데, 90%가 자동차 연료였다고 합니다.


벤츠,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 / 포드 모델 T


하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공급 과잉이 시작되면서 석유 공급량이 수요 증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했습니다. 석유의 공급량이 빠른 속도로 증가한 이유는 전 세계 생산량이 하루 126만 배럴에 불과하던 당시에 다음과 같이 세계 각지에서 유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①     1922년 베네수엘라, 하루 10만 배럴 

②     1926년 미국 오클라호마, 하루 10만 배럴

③     1927년 미국 오클라호마, 하루 50만 배럴까지 증가

④     1927년 이라크, 하루 5~10만 배럴


여기에 더해서, 글로벌 석유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소련의 원유를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되면서 만들어진 뉴저지 스탠다드 (후에 엑슨, 더 지나서 엑슨 모빌), 로열 더치 셸, APOC (후에 BP) 등 빅 3가 매입하면서 치열하게 가격 경쟁을 했고, 투기세력도 등장하면서 원유 가격을 흔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거대 석유 기업들은 석유 시장을 계속 손에 쥐고 흔들기 위한 짬짜미를 부릴 이유가 생겼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난 석유의 진가 (1914~1918)


자동차로 증폭된 석유 산업에 대한 의존도에 엄청난 힘을 실어서 석유 패권 시대를 불러온 가장 큰 동력은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석탄 vs 석유의 싸움이었던 1차 세계대전이 석유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과 유럽의 열강은 석유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지 확실하게 깨달았거든요. 


당시 독일은 철과 석탄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한 반면, 연합군은 기동성, 행동반경 등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석유를 ‘승리의 피’로 사용했습니다. (Henry Bérenger,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 위원장). 예를 들면,

①     연기가 전혀 나지 않는 석유 전함 vs 10km 밖에서도 연기가 보이는 석탄 전함

②     12명이 12시간 동안 연료를 채우는 석유 전함 vs 500명이 5일간 연료를 채우는 석탄 전함

③     해상에서도 연료 공급이 가능한 석유 전함 vs 반드시 항구에서 연료를 채워야 하는 석탄 전함

④     석탄 전함보다 행동반경이 4배나 넓은 석유 전함


아제르바이잔 바쿠 (Baku) 유전의 노동자들


결국 당시 세계 최대 산유국이었던 미국의 석유 공급(연합군이 사용한 석유의 80%를 미국이 공급했다고 합니다)에 힘입은 연합군은 1918년 8월 영국이 아제르바이잔(당시 러시아)의 바쿠 유전을 장악하고 3개월 후 독일은 패배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 전함의 40%가 석유 동력으로 바뀌어 있었고, 1914년 트럭 110대, 비행기 132대에 불과했던 프랑스군은 1918년에는 트럭 7만 대, 비행기 1만 2000대로 몇 백 배 증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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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석유 산업의 태동부터 빅 3의 탄생, 20세기 초반 세계가 석유에 의존하게 된 배경까지 전달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는 석유 가격을 안정시켜서 석유 시장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거대 기업들의 움직임에 대해 전달드리겠습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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