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회사에서 세바시처럼 다양한 분야의 강사들을 모셔 강연을 했다. 그때마다 꼭 참여해서 듣곤 했는데 그중 기억나는 한 강사가 있다.
그 시절 MBTI가 있었다면 EEEE라고 나왔을 정도로 기운이 엄청났다. 대부분 강한 I 성향의 청중을 위해 에너지를 뿜어냈던 분이다. 강한 I 성향 속에서 그나마 E 성향을 띠었던 나조차도 감당키 어려운 분이었다. 긍정적인 에너지와 뭐든 시작만 하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해주셨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고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니 정말 행복하다. 자신의 강연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행복해졌으면 한다고 했던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근데 왜 이렇게 글을 쓰냐면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강연이 마무리될 무렵에 명함과 같은 카드를 청중 한 명 한 명에 나누어 주었다. 그때가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강연날짜에서 딱 10년이 지난날 유명한 호텔 1층에서 다 같이 만납시다! 하고 적혀있었다.
이게 뭔 소리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뒷 면을 보니 10년 동안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 5가지를 적도록 칸이 나누어져 있었다.
"10년 동안 이루고 싶은 것들"
1. _______________________
2. _______________________
3. _______________________
4. _______________________
5. _______________________
대략 이렇게 생겼었던 것 같다.
다들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다. 10년 뒤에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강사는 뭐 든 좋단다. 그냥 꿈꾸며 살라는 의미로 생각나는 4~5개를 꾸역꾸역 적었다. 사실 1,2개는 정말 바랬던 것들인데 나머지 3개는 칸 채우기 용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이걸 명함처럼 가지고 다니랜다. 규칙이 있다면 구체적이여야 한다는 것.
10년 뒤에 자신이 마련한 장소에서 다 함께 모여 자신의 모험담을 이야기하잔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잠시 내가 적은 일들을 이루어 자랑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금 간질거린다.
그리고 다시 바쁜 삶을 살았다.
이사를 한 어느 날 그 명함의 카드가 옛날 다이어리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그래도 그 카드를 한 두해 정도는 지갑에 넣고 가끔 눈에 띄면 보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서
"네가 바랬던 일들.. 시도했고 이루었니?"
라는 질문을 하는 듯했다.
그리곤 카드를 꺼내 내가 적은 바래진 바람 5가지를 훑어보았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달성한 것 2개와 실패한 것 1개만 기억이 난다. 4개만 적은 것 같기도 하고.
1. 리눅스 커널 메인테이너
경력을 쌓으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초기에는 임베디드 환경에서 리눅스 커널을 개발했었다. 개발하는 시점에는 오픈 소스인 리눅스 커널에 패치하고 입지를 쌓은 뒤 메인테이너로 선정되면 아주 명예로운 일이다. 그때는 메인테이너가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냥 꿈만 같은 일이지만 되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적어두었다.
메인테이너의 직함?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도 많이 있었고, 꾸준히 커뮤니티에 나의 수정과 노력을 보여주니 특정 파일에 대한 메인테이너 권한을 부여받았다. 물론 너무 주목을 받지 못하는 부분이어서 나중에는 사라진 파일이긴 하지만 짧게나마 메인테이너로 활동을 했었다.
2. 기술서 출판하기
커널 메인테이너가 되는 과정에서 꽤 많은 수정 사항을 커뮤니티로 보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누구든 커널이라는 코드를 수정해 보는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라인에 어느 정도 정리해 둔 것이 있다 보니 책으로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안서를 꼼꼼히 채워서 출판사로 보냈다. 처음에는 거절을 받았지만 몇 일 지나니 출판사 다른 팀에서 전자책 POD 형태로 출판해 보자고 연락이 왔다.
여태 쌓아놓았던 노트를 모아 정리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조금 쉽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나의 이름으로 된 책을 하나 출판할 수 있었다.
3. 영어 공부 매주 2시간씩 하기
이건 지키지 못한 일인데, 오랜 기간 동안 영어를 했는데 외국인이 들어간 회의에 참관을 하는 과정에서 정말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 그냥 다짐정도로 생각하고 적어둔 것인데 잘 쓸 일이 없다 보니 흐지부지 되었던 목표 중에 하나이다.
나머지 1~2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적어 놓고 한 동안 보다가 잊고 지냈는데 우연히 이루웠는지도 모른다. 다만 처음 리눅스 커널에 나의 수정 사항을 보낼 때, 출판사에 제안서를 보낼 때도
"손해 보는 것도 없는데 그냥 한번 해보자"
이런 마인드였던 것 같다. 일단 해봐서 안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편히 진행했던 것 같다. 물론 그전에 고민은 많이 했다. 쓰자마자 보내고 그러진 않았으니까.
이런 좋았던 경험들이 10년을 기약했던 강사님의 마인드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냥 해보면 되는데 너무 고민만 하지 말자. 안되면 그 또한 좋은 경험이 되니까.
브런치에 글을 포스팅하는 것도 나의 글을 아무도 읽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도 했지만 안 읽으면 다른 사람의 글도 보면서 좋은 글을 배워나가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