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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거절을 잘 못합니다.

나이스 가이 신드롬

어릴 적부터 나에 대한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했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그동안 참 힘들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 시점에는 이런 나라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생겼고, 어느 시점에는 그런 부족함을 채워주는 주변인들이 있어 나의 삶이 채워졌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온 동네를 지하철로 돌아다니는데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안타깝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돈을 건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달라고 하면 있는 돈을 꺼내줬다. 그때 당시 지하철 요금이 500원 정도였는데 천 원씩 줬다. 특히나 좌석에 앉아가고 있다 보면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사정이 적힌 종이를 내 무릎 위에 놓고 간다. 지하철 한 칸의 끝에 가면 어눌한 말투로 도와달라 호소도 한다. 그런 다음 종이를 다시 수거해 가는데 종이만 줄 수 없어 돈을 건넸다. 상당 금액이 그런 식으로 나가다 보니 큰 마음먹고 한 번 그냥 보냈더니 그 뒤로는 크게 어렵진 않았다. 그분들이 한 번 더 달라고 하면 거절을 못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없으니까.


어쩌다 지하철에서 젊은 사람이 지하철 요금이 없다고 해서 돈을 드렸더니 역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 먹고 있는 걸 보고 나서는 더 마음을 강하게 먹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엠피쓰리(mp3)를 사러 용산에 간 적이 있다. 그땐 친구와 함께 갔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전자기기 층에 딱 나서자마자 바로 앞 가게 사장님이 손짓을 한다. 와서 보라고 가서 물건을 보며 괜찮은 걸 찾았는데 그때 기억으로는 17만 원인가 불렀다. 나는 물건도 맘에 들고 가격도 그 정도면 되겠다해서 지갑을 꺼내려는데 친구가,

"다른데 둘러보고 올게요~" 했다.

사장님은 약간 무섭게 생겼는데 "얼마 보고 왔는데!!?" 했다. 그러면서 1~2만 원을 깎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잉?" 하며 갑자기 깎아준다는 것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그 말씀 톤에서 무서움을 느꼈다. 그러곤 그냥 나오려는데,

"여기 다 똑같다! 가봐야 소용없어!"

이때 주저앉을 뻔했다.


그리곤 다른 가게에 갔는데, 가게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어서 사실 다 들릴 텐데 하는 걱정이었지만 그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가서 내가 봤던 거랑 비슷한 녀석으로 얼마냐고 물어봤다. 그 아저씨 이전 가게 가격을 들었는지 15부터 시작하더라. 친구는 여기서 한 번 더, "아.. 비싼데.." 한다.

네가 뭘 알아 이 좌식아! 그냥 사자! 응? 하며 사장님 눈치를 보는 내 속마음을 모르는지 무시한다. 사장님이 얼마 보고 왔냐고 무섭게 묻는다. 11만 원을 불렀다..

이 녀석 정신력이 엄청나다. 사장님이 주먹을 날려도 이젠 정당방위다. 사장님은 그건 안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친구는 과감하게 가게를 나온다. 그 뒤로 사장님이 13을 불러서 내 몸이 돌려던 차에 다른 집에 들어갔다. 내 정신력은 이미 바닥이다. 여기서 싸대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사고 떠나고 싶다.

이제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 고르는 건 그냥 바로다. 사장님은 약간 눈치를 본다. "이거 14에 가져가" 했는데 친구는 11을 외친다. 아니 이러다 큰일 난다고!!

다른 기종이라서 실랑이를 거친 뒤에 13에 합의를 봤다. 이건 모델도 더 나았고 13이면 훔친 거라고 봐도 된다. 그 녀석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모델도 괜찮고 해서 이걸로 하겠다고 해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곤 ATM 기기로 가서 현금을 찾은 다음에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왔는데 첫 번째 가게 사장님이 날 째려보는 것 같았다.

그 뒤로 혼자서는 용산엘 가질 않았다.


거절을 잘 못하고 한 번 들어간 가게에서 최대한 결정을 한다. 핸드폰은 매번 뭔가 비싸게 산다는 느낌이 들지만 할부로 나가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떤 기사를 봤는데, 외국에서는 흑인들이 그런 덤터기를 많이 당한단다. 아니 이런 인종차별적인 것이 있나 했는데 흑인들이 대체로 의심과 질문을 하지 않아서 판매자가 네고 가능한 금액을 불러도 그 가격에 산다는 것이다.

그래.. 질문을 해야 한다. 꼼꼼하게 그 대가가 제대로 된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상대방이 덤터기를 씌워 판매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잘 확인하지 않고 비교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가가 더 붙는 것이다.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얻은 것이 많다.

나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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