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엄마는 잡동사니 수집광이다. 길에서 나눠주는 물티슈와 행주, 다 먹은 고추장 용기와 남이 내다 버린 화분까지 쓸모 있는 것보다 쓸모없는 것들을 더 많이 모은다. 돈을 그렇게 모았으면 진즉에 부자가 됐을 거다.
엄마가 가장 많이 모은 건 검은 비닐봉지다. 고소한 깨 냄새가 나는 것부터 해서 콩나물 비린내가 나는 것까지 청결상태와 상관없이 모은다. 그 양도 상당해서 하나로 이어 붙이면 암막커튼으로 써도 될 정도다. 엄마한테 좀 버리라 했더니 쓰레기 담아 버릴 때 쓴다고 안 된단다. 그럼 적당히 좀 모으라고 했더니 막상 쓰려고 보면 없다고 그냥 놔두란다. 휴, 쓰레기 버리겠다고 쓰레기를 모은다니 환경 보호자가 들으면 식겁할 일이다.
얼마 전엔 옷 정리를 하다가 서랍 한 귀퉁이에 우산꼭지가 잔뜩 든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모두 엄마가 길에서 주워온 것들인데 낡고 닳아서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쓰레기다. 내가 버리자고 했더니 우산꼭지 빠지면 쓴다고 그냥 놔두란다. 요즘 우산꼭지 빠질 일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많이 모으냐고 했더니 그게 자리를 얼마나 차지한다고 버리라 하냐며 신경질을 냈다. 계속 말하면 또 싸우게 되니까 엄마 몰래 괜찮은 것만 몇 개 놔두고 싹 버렸다. 땅에서 주운 걸 집에 놔두는 게 찜찜하다. 돈이라면 또 모를까.
엄마는 헌 옷도 그냥 버리지 않고 일일이 단추를 떼고 버린다. 얼마나 많은지 수선집을 차려도 될 정도다. 요즘 나오는 옷들은 워낙 잘 만들어서 단추 떨어질 일도 없거니와 라벨에 여벌의 단추가 달려 있어 단추 하나 정도는 잃어버려도 괜찮다.
잡동사니 수집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안 쓰고 보관만 하는 세간이다. 우리집 베란다엔 욕조만 한 고무 다라이와 장 담글 때 쓰던 항아리가 있다. 요즘은 절임배추를 사서 다라이 쓸 일도 없고 시판용 장을 사다 먹으니 항아리도 필요 없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해 빨래 널 때마다 발에 걸려 짜증 났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마침 뉴스에서 고무 다라이에서 중금속이 나왔다고 하길래 당장 버리자고 했더니 무조건 버릴 생각만 한다며 폭풍 잔소리를 해댔다. 요새 이렇게 무겁고 튼튼한 고무 다라이는 팔지도 않는다, 중금속 나온 건 플라스틱 다라이가 틀림없다 이러면서 말이다. 그럼 항아리라도 버리자 했더니 골동품을 왜 버리냐며 펄쩍 뛰었다, 요즘 항아리는 유약을 발라놔서 숨구멍이 없어 못 쓴다나. 골동품은 무슨, 돈 주고 버려야 되는 비싼 쓰레기일 뿐인데.
내가 하도 이거 버려라, 저거 버려라 잔소리를 하니까 엄마도 짜증이 났는지 한 번은 “내 살림 건드리지 말고 빨리 시집가서 니 살림이나 잘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헐, 이 나이에 시집가서 내 살림을 하라고? 아이고, 어머니. 내 결혼에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셨나요?
이렇게 아무것도 못 버리던 엄마가 얼마 전엔 자기 사진을 몽땅 버려서 깜짝 놀랐다. 그래 놓고는 스마트 폰으로 셀카를 찍어대는데 누가 봐도 영정사진용이다. 오죽하면 초딩 조카가 그 사진들을 보고 할머니 요즘 이상한 사진만 찍는다며 시무룩해했을까.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면 죽을 때를 대비해 주변정리를 하는 것 같아 짠하다가도 한편으론 짜증이 난다. 정작 버려야 할 잡동사니는 못 버리고 간직해야 할 추억거리들은 내다 버리니 말이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엄마와 달리 난 막 버려서 탈이다. 얼마 전엔 악세사리함을 정리하다 동생의 귀걸이를 버려버렸다. 색깔이 거무튀튀해서 짝퉁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동생 친구가 생일선물로 준 14K 귀걸이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동생이 얼마나 잔소리를 하던지 짜증이 나서 똑같은 거 다시 사주면 되지 않냐고 했다가 욕만 더 먹었다. 친구가 선물한 거랑 내가 산 거랑 어떻게 똑같을 수 있냐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물어보지도 않고 버린 건 큰 잘못이다. 그것도 사연 있는 물건을 말이다. 그 사건 이후 내 나름의 정리 기준을 세웠다. 첫째, 남의 물건엔 절대 손대지 않기. 둘째, 돈 주고 다시 살 수 없는 건 절대 버리지 않기. 셋째. 설령 다시 살 수 있다 해도 사연 있는 물건은 버리지 않기.
사실 난 버려놓고 후회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년엔 소장한답시고 사 모은 수 십 권의 책들을 버렸고 불과 몇 달 전엔 7년 동안 써 온 필사노트도 버렸다. 필사노트엔 내 생각들도 적어놔서 누가 볼까 봐 일일이 찢어서 버렸다. 5권이나 되는 걸 찢느라 손도 아프고 2시간 이상을 허비했는데 요즘엔 괜히 버렸다 싶다. 안 버리고 그냥 놔뒀더라면 글감으로 요긴하게 썼을 텐데 말이다.
가장 아쉬운 건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8절 달력 뒷면에 깨알같이 써놓은 로또 번호들이다. 나름 아버지만 알 수 있는 규칙에 따라 만든 수열 같은데 요즘 그 번호들이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왠지 그 번호들 중에 로또 1등 당첨번호가 있었을 것만 같다. 잘 놔뒀다가 로또나 살 걸 정말 후회막급이다.
이렇게 막무가내 버리는 나도 잘 못 버리는 게 있다. 바로 잡동사고(雜侗思考), 잡생각이다. 나를 키운 건 1할이 잡생각이고 나를 망친 건 9할이 잡생각이다. 학창 시절, 잡생각 덕분에 가난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었지만 공부에는 방해가 됐다. 성인이 된 지금도 잡생각에 빠져 산다. ‘박새로이 박서준은 어떤 여자랑 결혼할까?’ ‘경비아저씨는 볼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하나?’ ‘8시 뉴스는 끝까지 다 보는데 왜 항상 내일의 날씨는 기억이 안 날까?’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어찌 보면 엄마의 잡동사니보다 내 잡동사고(雜侗思考)가 더 큰 문제다.
니체가 말했다. ‘쓸모없는 생각에 빠지는 것보다는 악을 행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라고. 아무래도 내년에는 템플스테이나 ‘멍 때리기 대회’라도 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