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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절교라니

#41. 중년싱글생존일지

by 대신돌이

J가 내 옆을 휙 지나갔다. 자기를 알아봐 달라는 듯, 등을 보인 채 내 앞으로 걸어갔다. 나랑 같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온 것 같았다. 길에서 자기를 보면 웃어 달라던 J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알은척을 할까, 하다 그냥 돌아섰다. 이미 끝난 관계다. 다시 예전의 감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


J는 중3, 고3 때 같은 반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어도 우린 친하지 않았다. 키가 커서 그런가, J는 학창 시절 내내 반에서 제일 작은 1번이랑만 같이 다녔다. 고3땐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했다가 1번이랑 먹어야 한다고 해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나 같으면 셋이서 같이 먹자고 했을 텐데.


J와는 졸업 후 친해졌다. J네 집이 양말공장을 해서 종종 놀러 가서 양말 뒤집는 알바를 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내가 모르던 J의 이면을 알게 됐다.


어느 날 J가 1번 얘기를 했다. 자기는 1번이 친구가 없어서 챙겨줬는데 1번이 다른 애한테 가서는 자기는 같이 다니기 싫은데 J가 자꾸 자기한테 와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녔다고 했단다. 중3 때의 1번은 공부할 방이 없다고 해서 자기네 집에서 두 달 동안 숙식을 하며 같이 공부했는데 연합고사가 끝난 후에는 자기를 .쳐다도 안보더라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니 J의 선행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J가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과잉 친절을 베푼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일종의 우월감이 깔린 선행이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일이 여럿 있었다. 한 번은 내가 고3 담임이 교감이 됐다더라, 했더니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며 깜짝 놀랐다. 얼굴 표정이 꼭 '그건 나만 아는 비밀인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J는 5년 넘게 담임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OO이가 담임을 만났다고 했더니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담임이 자기랑만 연락하는 줄 안 모양이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됐던 건 자기가 어린이집에 보조교사로 취직 시켜준 사람이 그 후로는 자기를 보면 인사도 안 하고 째려보기만 한다고 했다. 내가 “왜?”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그 자리를 뺏을까 봐 그런다나. 좀 황당했다. 어린이집 보조교사가 꿈의 직장도 아닌데 소개해 준 사람한테 뺏길까 봐 그런다니. ‘혹시 니가 소개해줬다고 유세 떤 건 아니냐,’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래도 J가 나한테까지 오지랖을 떨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나만 보면 집을 사라고 닦달을 해댔다. 자기가 어린이집 원장들을 많이 만나는데 지금 집값이 바닥이어서 집을 살 때라나. 건물주 딸이 백수한테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백수한테 집 사란 말을 하고 싶냐고 화를 냈더니 자기는 우리 언니한테 사라고 한 거라나. 어이가 없었다. 참견도 정도껏 해야지, 우리 형부가 있는데 어디서 훈수질인지.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어서 ‘우리 형부가 공인중개사다, 알아서 할 거다. ’라고 했더니 자기가 더 많이 안다고 계속 떠들길래 “너나 많이 사!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일 이후 난 J를 멀리했다. 하지만 J는 잊을만하면 전화를 했다. 내가 퉁명스럽게 받아도 J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나랑 친했던 동창이 암으로 죽은 날이었다. J가 전화를 했다. 같이 슬픔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던 나는 J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난 J도 슬퍼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세상에, 기껏 한다는 소리가 "걱정 없이 사는데 왜 암에 걸렸지?"였다. 그리고는 장례식장에 같이 가지 왜 혼자 갔냐고 했다. 기가 막혔다. 정이 뚝 떨어졌다. 슬퍼하지도 않으면서 장례식엘 간다고? 이 정도면 병이 분명했다. 자기애성 성격장애.


그날 이후 길에서 J를 봐도 대충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얼굴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J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갔으면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J와 J 엄마를 만났다. J 엄마에게 대충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J 엄마가 “야. 우리 J가 너한테 뭘 잘못했냐?"라고 하는 거다. J가 자기 엄마한테 나랑 있었던 일을 말한 것 같았다. 황당하고 수치스러웠다. J에게 '넌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했냐!‘고 소리를 지른 후 집으로 와 버렸다. 나이 오십에 길바닥에서 욕이나 처먹다니. 예의 따위 지키기 싫었다. 한편으론 팔순의 나이에도 딸 편을 드는 엄마를 둔 J가 부러웠다. 우리 엄마였다면 아마 딸이 그런 수모를 겪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었을 거다.


그 다음날 J가 전화해서는 자기가 나한테 뭘 잘못했냐고 따졌다. 그래서 그동안 일을 줄줄이 말했더니 실컷 자기 변명만 늘어놓다가 결국엔 한다는 소리가 "야, 우리 오십이다!"이러는 거다. 그 말이 더 기분 나빴다. 오십이면 뭐, 어쩌라고? 상대가 공감도 못하고 자존심만 긁어대도 참으라고? 미안하다. 난 못 참는다. 나잇값 못한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멀어지는 J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절히 빌었다.

행복해라~ 행복해라. 나 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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