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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돌이 Jan 13. 2022

너의 6주기

#9. 혼자 살아가는 중입니다 

6년 전 여름, 구름 한 점 없던 8월 어느  날, 네가 그랬지.

나, 폐암 말기래...


그런 네 말에 내가 해줄 수 있던 건 헛말뿐이었다.


넌 구월 사일생이니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거야.

손금이 조각칼로 파낸 것처럼 깊고 짙어서 오래 살 거야.

너나 나처럼 다리 두꺼운 사람은 오래 산다니까 우린 살기 싫어도 백세까지 살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암말도 안 했던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     


이목구비는 메릴 스트립을 닮았고 피부는 이영애를 닮았던 너.

지독한 음치면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시도 때도 없이 불렀댔던 너.     

먼저 의심부터 하는 나와 달리 먼저 믿고 보는 너.

도통 누굴 미워할 줄 몰라 답답스럽기까지 했던 너.


백화점  휴게실에서  처음 만난 여자가 인상이 참 좋다며 언니, 동생 하잔 말에 넌 선뜻 연락처를 건넸지.

내가 왜 그랬냐고 하니까 네가 그랬지.

“애 엄만데 뭘...”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 속도 뛰어들 만큼 무서울 수 있는 게 애 엄만데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믿다니, 난 그런 너를 이해할 수 없었어.

그런데 넌 그 여자가 너희 집에 오고 싶다고 하자 스스럼없이  초대까지 했다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을 내 집까지 들이다니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잔 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자기가 판매하는 다단계 물건을 잔뜩 들고 왔다지.

넌 황당했지만 어차피 필요한 물건이라 몇 개 샀지. 내가 뭐 그런 게 다 있냐며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너는 그 여자의 계속된 방문을 거절하지 못하더라.

바보, 천치 같으니!     


너의 호의가 계속되자 그 뻔뻔녀는 점점 고가의 물건을 들고 왔지. 결국 너의 인내심도 폭발해 설마 나한테 물건 팔려고 접근했냐고 했다지. 너의 그 말에 그 뻔뻔녀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말하냐며 오히려 화를 내고 가버렸다지.

미친 x.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쌍욕을 들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런데도 넌 내가 정말 의심한 거면 어쩌냐면서 한동안 속상해했지. 그땐 정말 네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다.      


딸 친구를 초대해 파자마 파티를 할 때, 넌 아이들이 좋아하는 중국음식과 피자를 시켜줬다지.

요리를 못하니까 배달음식을 시켜준 건데 그걸 안 딸 친구 맘이 불쾌해했다지.       

"언니, 어떻게 내 딸을 초대해놓고 배달음식을 먹일 수 있어요!"

(뭐래, 자장면이 어때서! 애들 기호식품 0순위 아냐!)


그 여잔 마치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그 다음날 네 딸과 너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지. 그래 놓고 차려낸 밥상이 코스트코 냉동식품이었다지. 속상해하는 너 대신 내가 욕을 해댔지.

"뭐야, 자장면보다 뭐가 더 나은데? 데우고 설거지밖에 더 했어? 미친 x. "

     

부친상 치르고 출근한 너에게 동료강사가 갑자기 선을 보게 됐다면서 대리 수업을 부탁했다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밥도 잘 안 넘어간다는 네게 말이야. 넌 어이없다면서도 그 여자의 부탁을 들어줬지. 선보러 간다는데 그럼 어쩌냐고...

그거야 지 사정이지.


넌 항상 그렇게 사람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차라리 그 에너지를 너한테 쏟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남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몹쓸 인간들까지 배려하고 살기엔 인생은 짧고 내 삶만 고달파지는데 말이야.

     

암세포가 뼈까지 전이되자 넌 만나길 꺼려했지. 기침이 심해서 통화도 힘들다며 우린 메시지만 주고받았지. 네가 죽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네 메시지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단다.

 그렇게 아픈 외 중에도 넌 병간호하러 온 노모에게 미안해서 기침을 참느라 애를 썼지.

엄마한텐  아프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도 됐을 텐데, 그게 오히려 엄마 입장에선 맘이 더 편했을 텐데,  아프단 소리 안 하고 고통을 참는 널 보는 네 어머닌 더 속상했을 거야.        

   

그런 네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흘렀다.

누가 철학 전공자 아니랄까 봐, 사는 내내 내세나, 환생 따위는 없다고, 인간은 한번 죽으면 그냥 소멸하는 거라고 그리 잘난 척을 하더니, 정말 꿈에 한번 안 나타나네.

      

오늘 난 네가 보낸 수십 통의 편지를 일일이 찢어버렸다.

네 말처럼 완전히 소멸한 너의 흔적을 남겨두는 게 옳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친구야!

고마웠다.

잠시였지만 내 곁에 있어줘서...


이젠 ...

진짜 ..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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