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가 떠났다. 오기도 전에.
2020년 3월 10일. 유산 진행 5일째.
비가 오는 꿈을 꾸고 눈을 떴는데도 빗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다.
(실제로도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다)
지난밤의 꿈은 꿈답게 엉망진창 의식의 흐름대로였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것들에도 의미가 있었고
나의 마음을 깨닫기에 좋은 꿈이었다.
꿈에서 나는 대학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장소는 바다와 야자수가 보이는 제주도였다. 내가 그리던 그림이 있었는데 제목에 제주라고 적혀있였다.
야자수 사이로 멀리 바다가 보이고 그 바다의 끝에 오렌지빛의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리던 그림을 잠시 벽에 기대어 두고 가족여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여행을 가려고 하는 곳은 '제주'가 아니라 '재주'였다. 나는 내일이 출발인데 정보를 하나도 안 찾아놨다고 초조해했다. 그렇게 허둥지둥거리다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기숙사가 최첨단이면서 자연친화적인 건물이었다. 건물의 전체적인 느낌은 영화에서나 보던 매끈한 재질의 우주선 같았지만 중간중간의 계단은 정글처럼 거친 나무 기둥에 홈이 파여 있었고 그걸 따라 올라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옥상 같은 곳으로 올라갔고 내가 그림으로 그렸던 순간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림처럼 노을이 져서 오렌지빛이 탁 트인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고 주변의 야자수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풍경이었는데 넋이 나갈 만큼 평화롭고 따뜻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고 있어도 춥지 않았다. 미지근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게 느껴졌다. 온도만큼 빗소리도 소곤거리고 부드러웠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대학 때 친했던 친구가 유모차에 아가를 태우고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고 근황을 나눴는데 친구는 육아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이내 가버렸다. 아가의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눈에 밟혔다. 어느샌가 내 옆에는 유모차가 있었는데 검은 천으로 덮여있었다.
천을 열어보니 텅 빈 공간 안에 아가의 얼굴이 붙어져 있는 병뚜껑이 가득했다. 나는 병뚜껑들을 손으로 담아보려 했지만 웃고 있는 아가 얼굴의 병뚜껑들은 계속 두 손 밖으로 흘러내리기만 했다. 이런 두 손을 보면서 아무것도 담지 못한 나의 자궁이 떠올랐다. 모은 손을 풀어버리고 가만히 병뚜껑의 아가 사진들을 들여다보니 모두 웃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조금씩 얼굴이 달랐다. 어떤 아가는 턱이 갸름했고 어떤 아가는 볼이 통통했다. 나는 아가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아가를 찾고 있었다. 나조차 본 적이 없는 '우리'아가를. 계속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가의 얼굴을 보고 버리기를 반복하다 이내 앞이 뿌옇게 바뀌는 걸 느꼈다. 갑자기 배꼽에서부터 울음이 숨과 함께 밀려 올라오는 걸 느꼈다. 꿈에서였지만 실제로 숨을 못 쉬었던 건 아니였을까란 생각이 들만큼 생생했다. 힘껏 단전부터 올라온 숨과 설음은 순식간에 터졌다. 나는 꺼이꺼이 울다 소리를 지르면서 오열했다. 거의 울부짖음이었다. 그제야 쏴아악 하고 빗소리가 폭우처럼 귀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 울다 눈을 떴다.
어제 자기 전 동생이 카톡으로 결혼식은 제주도에서 가족들끼리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배경이 제주였나 보다. 그리고 내가 여행을 가려고 했던 곳이 제주가 아니라 '재주'였던 것에도 이유가 있다. 내가 남편에게 서로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하나씩 합쳐서 아가 이름을 '재주'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래서 '재주'를 가고 싶어 했었던 것 같다. 검은색의 텅 빈 유모 차속 병뚜껑 아가들은 지금껏 선택받지 못했던 무수한 '우리'의 정자들이었을까. 왜 끝내 나는 아가를 찾지 못한 걸까? 우리 아가가 있었다면 나는 단번에 알아봤겠지? 다음번에도 아가를 못 찾는 건 아닐까?
눈을 뜨고 나서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 많은 질문들이 잠도 채 깨지 않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꿈에서 깨기 전 들은 시원한 빗소리가 금방 마음을 덮어주었다. 꿈에서나마 시원하게 운 덕분인지 기분이 조금은 개운했다.
ㅡ
오늘 오전에 피검사 결과를 전화로 전달받았다. 지난주만 해도 739였는데 105로 떨어졌다고 한다.
50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지켜보자고 하셨다. 정말 아가는 내 몸에서 떠났다.
아가가 재주에 갔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