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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수니 Feb 28. 2021

화장실을 다녀온 남편이 건넨 것

2년째 아기가 없는 2인 가구의 이야기

벌써 일 년이 가까워져 간다.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아기가 떠난 지. 유산을 경험한 뒤로 나는 될 일은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이 생겼다. 당시 나는 한약도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나름 준비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끝없이 나에게 물어보다 현타가 왔다. 전쟁 속에서도 아기는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 뒤로 인위적인 것은 하고 싶지 않아 졌다. (크게 소용이 있지 않았으니) 그저 무드가 이끄는 대로 하고 싶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배테기는 사용하지 않겠다 했고 병원도 가보지 않았다. 반면에 남편은 유산으로 배테기 사용에 더 굳은 신념이 생겼다. 결과는 안 좋았지만 당시 배테기를 써서 최적의 타이밍을 엿보았고 어쨌든 통하긴 했다는 것이다. 배테기를 먼저 사다 준 것도 사용법을 알려준 것도 남편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위치에 놓아둠

최근에 새해도 있었고 설까지 보내지 않았는가. 임신에 대해 초조해하는 나에게 남편은 며칠 전부터 배테기를 다시 써보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고는 했는데 여전히 내키는 건 아니었다. 마음에 없는 대답이라 그런 걸까? 화장실만 가면 새카맣게 잊고 나왔다. 볼일을 볼 때마다 기억력까지 같이 내보내는 것인가. 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배테기 상자를 화장실 선반 위에 올려두고 내일은 꼬오옥 해 보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리고 3일째인 오늘도 난 까먹었다. 나도 참 징허다.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오늘도 배테기를 못 했다고 시인했다. 성인군자답게 삼세번 기다린 남편은 이유를 물었다. (열 받은건 정말 아니라고 했다)


정말 까먹은 게 전부였다.

특히 오늘은 화장실이 급했다. 사실을 말하자니 이런 것까지 말해야 되나 싶었다. 아무리 부부이고 신비감이 희미해도 프라이버시라는게 있긴 하다. 다른 대답을 생각하다 마음속 구석에 있는 진심을 끄집어냈다.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1분 정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알겠다는 세 글자 대답을 뒤로 남편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싸운 건 아닌데 싸운 것 같은 그런 적막이었다. 인기척도 없는 고요 속에서 내 마음은 소란스러웠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맘에 걸려 혼자 속으로 못다 한 변명을 해댔다. 오늘처럼 급한 날은 페이스를 조절해서 중간에 테스트를 할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럼 전체적인 흐름이 꼬인다. 안 급한 날이어도 마찬가지. 테스트를 하려면 소변을 받을 컵도 필요하고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추고 평평한 곳에 둔 채 5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종이컵을 비우고 정리를 해야 끝이 난다. 이게 임신만 되면 모 대수겠냐는 생각이 정답일지 모르겠지만 난 저런 일련의 과정들이 솔직히 번거롭고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난 엄마가 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걸까. 혼자 정신승리를 하는 사이 남편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더니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화장실을 나와서는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왜인지 표정이 비장해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남편은 내 앞에 멈추더니 무언가를 쓰윽 노트북 뒤로 올려놓았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무언가를 나에게 건넨다? 과연 화장실을 다녀와서 줄만한 것이 있긴 한가? 노트북 뒤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정체가 추측조차 되지 않아 심히 두려웠다.


세상에나.
그것은 배테기였다.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금 해보라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며 살포시 집어 들었는데 느껴졌다. 손끝으로 온온한 촉촉함이. 나는 재빨리 내려놓고 한동안 배태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 줄이 진해지더니 서서히 다른 한 줄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번지는 배태기와 함께 내 마음도 촉촉해지고 있었다. 남편의 결과는 희미한 2줄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아무래도 오늘 밤인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왜 배태기를 해 본 거냐고. 남편은 내가 내켜하지 않는 걸 보면서 배태기를 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고 싶었단다. 나는 '생각해봐도 대충은 알잖아.'라고 했더니 정말 알고 싶은 건 해봐야지만 알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굳이 어떤 과정으로 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깐. 사실 마음속 저 밑에 왜 임신을 위해서 여자들만 해야 될게 많지라는 불만도 있었다. 일일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걸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무서워졌지만 (갑자기 결론이 호러) 남편이 나의 입장을 알고 싶어서 어떠한 행동을 하였다는 것에 무한 감동이었다. 우리 아직 신혼이긴 한가보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은 꼭 배테기를 써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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