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붕이 한국 최초의 IOC 위원이 되기까지
대한올림픽위원회 KOC가 1947년 인준된 후 현재까지 약 70여 년 동안 한국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의 위원으로 활동한 사람은 총 11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초대 IOC 위원은 이기붕이었고 그가 선출될 때가 1955년이었으니, KOC가 인준된 지 약 8년만이 일이었습니다. 이기붕은 어떻게 IOC 위원이 되었을까요?
이기붕이 IOC 위원으로 선출될 때 상황을 보면 약간 복잡 미묘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쟁이 있었고, 이미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서방과 동구권은 냉전체제로 돌입하던 때였습니다. 와중에 전쟁으로 한반도의 남북은 나뉜 상태가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에서 정치적 입지가 확고한 이기붕을 IOC 위원으로?
우리 스포츠 역사에서 IOC 위원이 어떠한 방식으로 추천되었고 선정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역대 IOC 위원을 보더라도 명색이 당대 확실하게 빽(?)과 줄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으니 아무나 함부로 추천되고 선정된 것은 아니었음도 분명합니다. 게다가 일의 속성 상 그 내용과 과정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터이니, 그 모든 것의 해석은 후대 사람들의 소설 속에서나 다시 탄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IOC 위원 선정을 위한 작업은 그들 간의 상호 정치적 눈치와 암시로 정리되었을 공산이 매우 큽니다.
오늘의 글은 이기붕이 IOC 위원이 될 때까지 어떠한 과정들이 있었고 어떠한 노력들이 있었는지 정리해보고 나름 상황을 해석하는 것으로 달려보겠습니다.
IOC에 인준받고, 1948년 생모리츠와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한 KOC는 IOC를 향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인준 과정에서도 공언하였듯, 아마추어 스포츠와 올림픽 정신을 준수하고 공정한 가치와 행동을 따를 것을 약조한 터였죠. KOC 입장에서 이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방법은 올림픽 참가를 넘어 누군가 IOC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은 바로 진행됩니다.
1949년 4월 18일 이원순은 IOC 회장인 에드스트롬 (Sigfrid Edstrom)에게 전신을 보냅니다(14-1). 내용은 조만간 로마에서 개최될 IOC 회의에 (총회는 1949. 4. 21-27. 집행위원회는 4. 26.) 한국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의 메시지였습니다. 전보를 받은 에드스트롬은 지체 없이 비서를 통해 바로 다음과 같이 답장을 해 줍니다. ‘로마회의는 IOC 위원(member)만이 참가할 수 있으며, 국가올림픽위원회는 대상이 아님.’ 이 전보를 받은 이원순은 다시 바로 답신을 보냅니다(14-2). ‘솔직히 KOC는 한국민에 대한 IOC 위원 부여를 빨리 고려해주기를 바라며, 이로써 우리가 IOC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임 (KOC earnestly request your earliest consideration in granting IOC membership to Korean National so that we may participate and share in IOC program)’
이원순이 에드스트롬에게 보낸 이 두 장의 전신은 한국의 스포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행위로 해석됩니다.
먼저 형식적이고 내용적으로, 이 사료는 KOC가 IOC에 최초로 위원 선임에 대한 굳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원순이 전신을 보낸 곳이 뉴욕이었지만, 이원순은 자신을 KOC의 대표자(representative)로 적고 있죠.
둘째, 전신을 보낸 시기의 의미입니다. 1949년 로마에서 열리는 총회와 집행위원회는 1948 런던올림픽 이후 첫 번째 회의이며, 따라서 그동안 다른 회의 일정이 없었는데, 회의가 열리기 단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회의 참석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뉴욕에 있는 이원순이 급하게 전신으로 보냈다는 것은, 아마도 급하게 결정된 사항일 것이고, 혹시 KOC 측에서 누군가 가야 한다면 당장 로마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이원순 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죠. 뭔가 급했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줍니다.
셋째, 전신을 보낸 의도입니다. 이원순이 첫 번째 전신에서 회의 참석을 요청한 것인데, IOC 총회와 집행위원회의에 IOC 위원만이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원순이 정작 몰랐는지 불명확합니다. 이미 1947년 스톡홀름 총회에 참여했던 이원순이었고, 1948년 런던올림픽 중에 열린 총회에서도 한국의 대표가 참석할 수 없었던 경험을 상기한다면, 이번 로마총회에도 참석할 수 없음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참가를 요청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도가 다분했을 것으로 해석될 수 있죠.
넷째, 셋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4월 19일 이원순이 보낸 두 번째 전신의 단어 선택에서 보입니다. 먼저 ‘솔직히(earnestly)’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정중하게’ 또는 ‘직설적으로’란 의미로도 쓰일 수 있지만, 이원순이 하루 전에 보낸 첫 번째 전신과 연계하여 해석한다면, 여기서 ‘솔직히’란 아마도 ‘어제 보낸 전신의 의도는’ 정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라면 이원순은 자신이 로마 총회에 참석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참가를 요청했던 것은, 결국 우리도 IOC 위원 자리를 원한다는 말을 하려 했던 사전 어필이었을 것이란 점입니다.
다섯째, IOC 위원을 요청하면서 그 대상을 명확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원순은 ‘한국민(Korean National)’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중의적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한국사람’의 일반적 표현일 수도 있는 동시에, 독점적으로 ‘한국 국적자’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이미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으며, 시대적 상황은 남북이 서로 경쟁하는 체제였던 것을 감안하면, 결국 IOC 위원을 남한에서 선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국제 스포츠 위상 확보와 영향력의 포석일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먼저 IOC 위원 부여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earliest)’라는 단어도 놓치지 않았겠죠.
‘솔직히 KOC는 한국민에 대한 IOC 위원 부여를 빨리 고려해주기를 바라며,’ 이 한 문장이 KOC의 필수적인 요청과 의도, 의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원순의 한국인 IOC 위원 선임에 대한 요청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일 것이고, 1952년 브런디지 (Avery Brundage)가 새롭게 IOC 위원장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인으로 IOC 위원에 추천되고 선임되는 과정은 IOC 내에서 위원 선임과 관련된 분위기 변화와 맞물리기도 합니다. 먼저 IOC 분위기를 보죠. 1954년 5월 3일 스위스 로젠에서 열린 IOC 집행위원 회의록입니다(14-3).
‘브런디지 회장은 금년에 새로운 위원 선출을 하지 말자 제안했고, 벌리 경(Lord Burghley)은 루마니아, 칠레, 터키 위원을 추천 제안하였음. 긴 시간 논쟁이 있은 후, 회장의 제안을 따르되 아테네 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함.’
IOC 위원 선임과 관련된 안건은 집행위원회의에 이은 5월 11일부터 사흘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다시 다루어집니다. 다음은 1954년 아테네 총회 회의록입니다(14-4).
‘확인한 것은, 원칙적으로 IOC 위원은 IOC 대사로서 자국에 있는 것이며, 출신국 대표자로 IOC에 있는 것은 아님. 다만, IOC는 위원 선출에 자유를 가짐. (중략) 앞으로, IOC는 각국에서 1-2명이 대표할 것임.’
두 회의록을 보자면 기존의 IOC 위원 선출은 국가의 대표자가 아닌 개인별 선임이었습니다. 집행위원회였던 총회였던 많은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IOC 중심의 개별적 선임을 원칙으로 고수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다만 앞으로 가능하다면 다양한 국가에서 위원이 선임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반영하게 됩니다. 위원들의 출신국 편향을 완화하고 위원들의 불만과 의견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이상백은 IOC에서 이 회의 안건과 결정 내용에 관해 브런디지에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합니다. 이상백이 1954년 9월 1일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내용이 보입니다(14-5).
‘나는 오히려 현재까지 이어온 규정 하에 진행된 선임 방식을 선호함. 만약 IOC 위원이 국제올림픽위원회 NOC의 대표자 집단이면, 이것이 유엔과 같은 정치적 회합과 다를 것이 없음. 이렇게 될 경우, 스포츠를 대표하는 인물이 위원으로 선임되기보다, 현재 상황에서는 스포츠를 모르는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대표로 될 수 있기 때문임. (중략) 한국에서도 이 점에 대해 불만이 있기도 함. 그러나 나는 NOC의 요구로 IOC 위원이 선임되는 것이 아니라 IOC가 추천하는 것이라고 언제나 역설하고 있음. 그럼에도 올림픽 활동이 필요한 곳에는 위원이 없고 IOC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중국은 3명의 위원이 있는 것 또한 납득이 안 됨. 나는 IOC의 현재 방식에 찬동하나 공정과 균형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선정방식이라고 생각함.’
이상백은 IOC의 권한으로 위원을 선임하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한국과 같은 올림픽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국가에서도 위원이 필요함을 우회적으로 의사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원순이 KOC 입장으로 위원 선임을 요청한 것에 대한 수위 조절에 들어간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위원의 필요성 또한 당위적으로 설득하고 있었죠.
이 편지를 받은 브런디지는 이상백에게 9월 15일 답신합니다(14-6).
‘가능한 많은 국가를 대표하는 IOC 위원이 있는 것이 필요함. 그러나 적당한 사람을 찾는 것이 문제임. 사람이 문제이지 국가가 문제는 아님. 중국 위원들은 최근에 합리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음. 지난번 회의에서 새로운 규칙을 도입했고, 앞으로는 큰 나라에서 2명으로 하는 것을 제외하고, 한 국가에 한 명이 선정될 것임. 이로써 우리에게 더 많은 대표성의 기회가 주어질 것임.’
브런디지의 이 편지는 IOC 총회 결정에 근거하여 앞으로 IOC가 가능한 많은 나라의 위원을 확보할 것이란 뜻을 설명한 것입니다.
브런디지의 편지를 받은 이상백은 10월 23일 브런디지에게 다시 답신합니다(14-7). 이 편지의 마지막 한 문장은 56년 멜버른 올림픽이 열리기 이전에 한국에 방문하기를 초청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IOC가 앞으로 더 많은 국가에서 위원을 선정하겠다고 한 차에 KOC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IOC 위원을 소유하는 것의 이점이 상당했을 것이고 문 열렸을 때 들어가고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했으니까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갑니다.
브런디지는 1955년 5월 5일 한국을 방문합니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초청하는 한국이나 방문하는 브런디지 모두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하든 적정한 인물을 추천하여 IOC 위원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고, 브런디지는 이를 확인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브런디지가 한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1955년 4월 28일, KOC 결의문을 보도록 하죠. 이 결의문은 ‘한국민 IOC 위원 2명 선출을 위한 결의문(Resolution of election of at leat two Korean Nationals as members of the IOC)’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것인데, KOC 특별회의로 의결된, 이기붕과 이상백의 명의로 된 것입니다(14-8). 내용은, 제목에서 보듯이 KOC가 특별회의를 소집하여 한국민 2명이 IOC 위원으로 선정되기를 바라며, 한국 내에서의 올림픽 활동, 그동안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KOC의 역할 등을 설명하고, 이 결의문이 IOC 위원들과 브런디지에게 전달될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이 결의문은 브런디지가 한국을 방문한 5월 5일 커버레터(cover letter)와 함께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14-9). 이 커버레터는 결의문을 첨부함을 적으면서, 이 결의 내용이 브런디지 IOC 회장의 추천으로 IOC에서 신중하게 검토되기를 바란다고 적고 있습니다.
브런디지의 한국 방문이 있은 후 1955년 5월 26일, 이기붕은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14-10). 이 편지는 이기붕, 이상백, 최순주, 이렇게 3명의 IOC 위원 후보의 이력서와 사진이 첨부됩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첨부는 55년 6월 파리 IOC 회의에서 고려될 3명의 이력서와 각 한 장씩의 사진임. 당신의 최근 한국 방문에서 IOC 공식 국가 대표로 우리나라에서 한 명이 선정되는 문제를 논의했음. 반도호텔에서 말한 바와 같이 3명을 추천하며 IOC에서 한국의 공식적인 대표로 고려되길 바람. 이력서 한 부는 회장 사무실로 한 부는 당신에게 보냄. 6월 파리에서 우리나라의 대표가 IOC 위원으로 선정되기를 바람.’
이 편지에 브런디지는 6월 4일 이기붕에게 답신합니다(14-11). 한국 방문에서의 즐거움과 기억을 말하며, 보내준 이력서 잘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한 명 밖에 선정되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도, 파리 회의에서 해결되도록 기대한다고도 적었습니다.
1955년 6월 13일. 이기붕은 파리 IOC 총회에서 세 명의 다른 위원과 함께 거수로 만장일치의 합의로 새로운 IOC 위원으로 선출됩니다(14-12). 세 명의 다른 위원은 이미 한 해 전에 추천되었던, 루마니아, 칠레, 터키 위원이었죠.
일단 이기붕의 선출은 기정사실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브런디지는 세 명의 한국 후보 중에 정말로 이기붕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했을까요? 다른 사료는 이 해석을 조금 헷갈리게 합니다.
서울로부터 3명의 IOC 위원 후보 이력서를 받고 브런디지는 여전히 고민한 듯합니다. 이기붕에게 세 명의 이력서를 잘 받았다고 답신을 쓴 하루 전인 6월 3일 브런디지는 월터 정(Walter Jhung)에게 편지합니다(14-13).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월터 정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세 명 모두 선호되며 누구든 잘할 것으로 보임. 당신의 개인적인 비밀 의견을 요청함. 누가 아마추어 스포츠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며, 강한 성격의 스포츠 경험이 있으며, 국가적으로 충분한 위상을 갖추고 국제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 독립적 기상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 의견 바람.’
이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자신이 이틀 후에 파리로 떠나 8일부터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물 것이며 편지를 주던지 급하면 전신을 달라고도 씁니다. 월터 정은 이 편지를 받고 6월 15일 브런디지에게 답신합니다(14-14). 월터 정은 개인적인 비밀 의견임을 전제로 이상백을 추천합니다. 그의 이력이 자격을 보증하고 지난 모든 시간 동안 그가 가장 오랜 시간 일관적으로 봉사한 것에 대한 평가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월터 정이 편지를 작성하기 이틀 전에 이미 파리 총회에서 이기붕이 선출된 상태였습니다. 브런디지가 월터 정의 편지를 받은 때는 이미 파리 총회가 끝나고 난 후였습니다. 브런디지는 월터 정의 편지를 늦게 받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적고 있습니다(14-15). 만약 월터 정의 편지가 총회 전에 브런디지에게 전달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인용자료
(14-1) 이원순이 에드스트롬에게 보낸 전신. (1949. 4. 18.) 스위스, 로젠, D-RM01-CORES-002 Correspondence of the NOC of KOR-01 1947.01.01.-1963.12.31. OSC, IOC.
(14-2) 이원순이 에드스트롬에게 보낸 전신. (1949. 4. 19.) 스위스, 로젠, D-RM01-CORES-002 Correspondence of the NOC of KOR-01 1947.01.01.-1963.12.31. OSC, IOC.
(14-3)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Commission exécutive 1921-1984. 1954-05-Lausanne. 02-Procès-verbal-eng. pg. 4. OSC, IOC.
(14-4)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Session 1894-2013. 1954-Athènes-50. 02-Procès-verbal-eng. pg. 7-8. OSC, IOC.
(14-5)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 (1954. 9. 1.)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6)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낸 편지. (1954. 9. 15.)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7)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 (1954. 10. 23.)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8) ‘한국민 IOC 위원 2명 선출을 위한 결의문(Resolution of election of at leat two Korean Nationals as members of the IOC)’ (1955. 4. 28.)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9)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커버레터 형식 편지. (1955. 5. 5.)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10)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 (1955. 5. 26.)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11) 브런디지가 이기붕에게 보낸 편지. (1955. 6. 4.)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12)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Session 1894-2013. 1955-Paris-51. 02-Procès-verbal-eng. pg. 7. OSC, IOC.
(14-13) 브런디지가 월터 정에게 보낸 편지. (1955. 6. 3.)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14) 월터 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 (1955. 6. 15.)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4-15) 브런디지가 월터 정에게 보낸 편지. (1955. 7. 22.)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사진 14-1) 이원순이 에드스트롬에게 보낸 전신. (1949. 4. 18.) 스위스, 로젠, D-RM01-CORES-002 Correspondence of the NOC of KOR-01 1947.01.01.-1963.12.31. OSC, IOC.
(사진 14-2) 이원순이 에드스트롬에게 보낸 전신. (1949. 4. 19.) 스위스, 로젠, D-RM01-CORES-002 Correspondence of the NOC of KOR-01 1947.01.01.-1963.12.31. OSC, IOC.
(사진 14-3) 브런디지 한국 방문 사진첩. (1955. 5.) Univ. of Illinois Urbana Champaign. Brundage Archive-Scarpbook S27, S27A. (사진설명) 대한올림픽위원회가 브런디지의 한국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여 보내준 사진첩
(사진 14-4) 브런디지 한국 방문 사진첩. (1955. 5.) Univ. of Illinois Urbana Champaign. Brundage Archive-Scarpbook S27, S27A. (사진설명) 브런디지의 한국 방문 (1955. 5. 5.) 당시 공항에서의 영접 장면. 왼쪽부터 이원순, 이기붕, 브런디지, 이상백.
(사진 14-5) 브런디지 한국 방문 사진첩. (1955. 5.) Univ. of Illinois Urbana Champaign. Brundage Archive-Scarpbook S27, S27A. (사진설명) 브런디지의 이승만 면담 장면.
(사진 14-6) 이상백. (circa. 1940 년대) IOC Member- Lee, Dr. Sang, Back (Korea) 1946-59. Avery Brundage Collection, 1908-82. Series No.: 26/20/37. Box: 62. Univ. of Illinois Urbana Champaign.
(사진 14-7) 월터 정, 구글 이미지.
[사진 설명]
이기붕,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