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꿈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에서 가족끼리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나 혼자 차에서 내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고, 혼자 내려 길을 걸었다. 차에서 내리고 마주한 풍경은 복잡한 도심 속 위치한 어느 한옥마을이었다. 뿌연 하늘과 차가운 공기는 그 시간이 새벽임을 말해주었다. 그곳은 사람이 많은 듯 적은 공간이었다. 걷다 보면 사람이 없어 텅 빈 골목을 걷다가, 갑자기 한두 명의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옥 사이의 골목을 헤매다가,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이의 소리였다. 그 길로 나는 본능적으로 울음소리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아이를 찾아 안아 들었다. 아이를 안고 다시 그곳을 빠져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굴다리를 지나, 차가 달리는 도로 옆에 난 좁은 인도를 걸었다. 그러다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이를 안고 여자 옆에 앉았다. 여자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예요?”
여자는 답했다.
“새벽 3시예요.”
“저.. 갈 데가 없는데, 오늘 밤 여기서 같이 있어도 될까요?”
여자를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자기도 갈 데가 없다고 말했다.
그날 잠에서 깨고 며칠이 지났지만, 그 꿈이 잊혀지지 않았다. 선명하게 남은 잔상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 두었다. 꿈을 통해 내 안의 무언가와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위 심리학에서 하는 꿈 분석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저 이 꿈속에서의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혼자 걸었고,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안았고, 어떤 여자와 함께 추운 새벽을 견뎌냈다. 그 상황들은 다소 슬프고 외로워 보였는데 꿈에서 깨고 남은 감정은 ‘담담함’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지나온 것처럼, 그리고 그런 나를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너무 깊은 마음이라서 감각조차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땅속에 있는 뿌리처럼 근원적인 나를 마주하게 되어, 되려 강력한 감정에 압도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땅 위는 평온하고, 그래서 내 마음을 나를 모르겠다.
그 꿈이 지나가고 난 뒤,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겼다. 뿌리채소를 한가득 넣은 밥이 먹고 싶어졌다. 밥에 무언가를 섞는 걸 싫어하는 남편과 아이를 생각하면 메뉴를 바꿔야 하는데, 그날은 날 위해 밥을 짓고 싶었다. 밑반찬을 만드려고 사둔 연근과 우엉을 꺼냈다. 냉장고 한편에 늘 마련해 두는 당근도 함께 꺼냈다. 뿌리채소 3종 세트가 모이니, 갑자기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아주 깊은 위안과 충전의 시간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우선 뿌리채소를 손질하였다. 매번 손질되어 있는 우엉만 구입하다 처음으로 흙이 묻어있는 생 우엉을 사봤다. 기다랗고 얇은 모양의 우엉은 속에 단단함을 머금고 있었다. 흙을 씻어주고 껍질을 손질했다. 우엉을 얇은 모양으로 썰기 시작하자, 쌉쌀한 흙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그 향기가 평화로워서 채 썬 우엉이 한가득 쌓일 때까지도 칼질이 힘든지 몰랐다. 다음에는 통통한 연근을 집어 들었다. 겉에 묻은 흙과 껍질을 잘 씻어주고 구멍에 들어간 흙도 물로 씻어주었다. 연근은 얇게 통으로 썰었다. 퉁퉁하던 연근이 납작해지자, 동글동글 뚫린 연근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큰한 당근도 채 썰어주면서 뿌리채소 손질을 끝냈다.
그리곤 밥솥에 불린 쌀을 넣었다. 그 위에 손질한 뿌리채소들을 한가득 쌓아주니 주황빛, 거뭇한 색깔, 은은한 상아 빛깔이 섞여 풍성한 모습을 드러냈다. 밥의 찰기를 위해 올리브오일 한 숟갈과 다시마 한 장을 넣고 취사버튼을 눌렀다. 밥이 지어지면서 밥솥에서는 ‘치익’ 소리와 함께 김이 뿜어져 나왔다. 뜨거운 연기 안에 뿌리채소의 흙향과 달큰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완성된 뿌리채소밥을 먹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뿌리채소의 향이 밥과 어우러져 은은하게 입안을 감싸주었으니까. 물론 남편과 아이는 취향이 아닌지, 나만큼 맛있게 먹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한 그릇은 내게 지난밤에 꾸었던 꿈같았다. 그저 차분해지고,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맛이었다.
어쩌면 나는 꿈을 통해 내 저변에 있는 근원 하나를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땅 속에서 보이지 않은 채로 자라나는 뿌리채소처럼, 나에게도 현실에서는 바라보기 힘든 무의식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그 근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뿌연 안갯속에서 마주했던 꿈속의 나를 조용히 응원하게 됐다. 혼자 걸어가는 시간도, 빠르게 달려가 아이를 안아 들던 행동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새벽도. 내겐 인상 깊었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깊이 새겨졌다. 그렇게 내 안의 뿌리가 좀 더 치유받길 바란다. 그 바람으로 뿌리채소밥 한 그릇을 비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