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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은 Oct 22. 2023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고 나서

무지에 기반한 행위는 과연 용서될 수 있는가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고백하겠다. 처음 이 영화를 알게 되었을 즈음, 나는 이 영화가 그저 잘 만든 야동인 줄로만 알았다. 욕조에 나란히 들어가 있는 두 남녀. 그 신은 워낙에 유명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엔 나체의 두 남녀가 강렬하게 각인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보기도 전에 '그저 그런 야한 삼류 영화'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오해를 하게 만든 유명한 욕조 씬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아직까지 내게 생생하게 남아있다. 영화의 몰입감에 여운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섹슈얼하고 발칙했으며, 아름다우면서도 꺼림칙했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의 리뷰 영상으로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고, 이번엔 두 남녀의 사랑을 넘어서서 여러 가지 다른 관점으로 이 영화를 천천히 곱씹어 보게 되었다.









 우선, 남녀 관계를 기반으로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나는 ‘회피형과 회피형의 억척스러운 사랑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한나는 말없이 마이클을 떠나고, 마이클은 재판 속 한나에 대한 누명을 침묵하며, 수감 생활 중 날아오는 그녀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언어 공부만을 도울 뿐. 그런데도 한나는 꾸준히 그의 대답을 요구하다 또 한 번 말없이 마이클 곁을 떠난다. 영원히.


 ​무엇이 그들의 대화를 막은 것일까? 스물한 살의 나이 차이? 고집스러운 성격? 그 모든 걸 비롯한 사회적 시선?


누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한나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내 침묵을 지키는 마이클


 영화를 보는 내내 서로에 대해 한 톨도 털어놓지 않는, 두 남녀를 보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특히, 변호사라는 직업을 준비하면서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인 피고가 누명을 써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데도 끝내 어떠한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던 마이클을 나는 좀처럼 이해를 하기 힘들었다.


 ​물론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이 그녀 자신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치부이자 숨기고 싶은 비밀이라지만. 그 대상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가족, 친구, 연인 등…)으로 치환한다고 가정했을 때 마이클처럼 입 한 번 벙긋 않는 사람은 아마 굉장히 드물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마이클은 아무리 무지로 인해 비롯되었다지만, 전범을 저지른 한나를, 더불어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곁을 떠난 한 여자를 그저 벌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한나는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난 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의 딸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 하던,  마이클은 그제야 멈춰있던 자신의 시간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이클이 한나의 죽음을 천천히 짊어지는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이미 죽고 나서 그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인간에게 어쩌면 죽음만큼 강력한 충격은 또 없기에 그런 마이클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일 많이 든 생각은 역시나 ‘소통의 중요성’이다. 나는 모든 관계의 기반은 대화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넌 날 화나게 못한다면서 불쑥 화를 내는 한나


 종종 우리는 누군가와 싸울 때나 관계가 틀어질 때 "너랑 말도 섞기 싫어"라는 말을 입 밖에 내곤 한다. 그 말엔 관계가 어떻게 되든 이제 나는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군가와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을 때를 생각해 보자. 주구장창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속만 끓이고,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망상으로 밤을 지새울 게 뻔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보단 먼저 용기를 내서 몇 마디라도 섞을 시간을 가져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당연하게도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잘 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사무직으로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맹인 한나는 기뻐할 수가 없다.


 만약 마이클이 재판에서 한나가 문명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한나가 마이클에게 자신이 속죄했음을 밝혔다면 그랬다면 나는 좀 더 다른 미래가 그들에게 펼쳐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이 차이가 어쨌든, 과거가 어쨌든, 사회적 시선이 어쨌든 간에 한나는 마이클을, 마이클은 한나를 원했다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처럼 타인이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 착각하거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소망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에 내지 않은 말로 평생 관계를 묻어야 될 수도 있고, 한나처럼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마이클이 여태껏 곁을 내주지 않던 딸에게 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그녀에 대한 ‘말’을 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이 다시 달라질 것을 암시하듯이 말이다.








 남녀 관계를 기반으로 느낀 점을 지금까지 쭉 서술했지만, 전범 영화를 이토록 세련되고 담백하게 제작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전범국의 침략을 받은 나라로서 그와 관련된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대부분은 실제 독립군들을 재조명한 영화이거나 판타지를 섞어 일본군들을 처단하는 영화이거나 아니면 눈물 없인 보지 못하는 신파극에 불과하다.


등장인물의 대사로 하여금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제는 그 진부한 프레임에 벗어나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되, 관객들이 마냥 ‘연민’이라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한다. 특히, K-콘텐츠가 전 세계의 관심을 받는 요즘이 적기가 아닐까 싶다.








 무지로 인해 벌인 행위를 용서하는 건 법의 심판 이전에 결국 피해자의 몫이겠지만, 무지를 이유로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질타받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은 내가 무지했음을 받아들이고,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 한나가 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던 것처럼 말이다.


 ​무지란 얼마나 무서운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영화처럼 범죄를 저질러도 자각조차 못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배워야만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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