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나면 서른 살이라는 나이가 된다. 스무 살의 나이에 십 년 후를 꿈꾸면 되었을 나이. 요즘 들어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내가 꿈꾸던 것은 무엇인가 좀처럼 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도 있고, 약 십 년이란 세월 동안 나란 사람이 몇 번이나 바뀌어서 그런 것도 있다.
바뀌지 않을 거란 마음, 변하지 않을 거란 의지. 그것들이 혹여 바라고 녹슬세라 얼마나 정성스레 갈고닦았는가.
하지만 그것들이 한 사람의 초심이나 결연함, 순결함과는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허물어질 거라는 걸 알고 난 이후에는 나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게 비단 나라는 사람을 넘어서서 작디작은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싶은 마음이 옛날에 비해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생각은 오래전에 썼던 글에 비해서 최근 글이 담백해진 것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내가 꿈꾸던 인생은 무엇인가.
어렸을 때는 지금에 비해서는 그나마 모든 게 쉬웠고, 즐거웠다. 마음만 먹으면 힘이 들지만, 뭐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비록 지금은 어리지만, 들어가는 나이에 맞춰 지덕체(智德體)를 갖추면 언뜻 서른 살의 나이쯤엔 고상하고 근사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게 뭔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이리 손이 많이 가고, 힘에 부칠줄이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한 이상이 워낙 분명했는지라 나를 할퀴고 부수는 모진 풍파에도 지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너무 딱딱하면 부러진다” 어쩌면 이 말은 20대의 나를 표현하는 아주 적절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부러졌냐고 물어보면 부러질뻔한 위기의 순간이 많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진 어찌어찌 잘 살아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년 전부터 나는 소극적인 범위 내에서만 적극적인 나를 탈피하기 위해 엉금엉금 노력해 왔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으며, 많은 웃음과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20대의 마지막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어렸을 때 생각하던 고상하고 근사한 어른이 되었니?”라고 물으면 단번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이는 통창 앞에서 무언가 고심하듯 온더락 잔을 흔드는 어른의 모습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나의 취향이 흠뻑 깃든 집에서 매일 잠에 들고 깨며, 우울한 날엔 타이거 레몬 맥주와 좋아하는 영화를, 마음만 먹으면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밤엔 근처 청계천에서 시원히 뛰어다닐 수 있는 현재의 삶을 고상함에선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사함에선 단연코 멀지 않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머지않은 30대엔 내가 나 자신을 못 이겨 부러지기보다는 때에 맞춰 구부러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수용과 융화를 핵심 키워드로 삼아 성장해나가고 싶다.
나는 내 인생이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앞으로도 나는 깨지고 줘 터지며,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이 인생이라는 것을 잘 살아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쓸 것이다. 어찌 됐든 내게 주어진 삶이 하나뿐이라면 이왕이면 재밌고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
그때까지 비록 부족하고 모자랄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부디 잘 부탁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