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다

최길수의 딸, 최다은

by 최다은

아빠는 내게 다정한 아빠는 아니었다. 나를 부를 때면 ‘딸’이라는 말 대신 언제나 “야, 최다은” 하고 본명을 불렀고, 수술을 마친 뒤 혼자 집에 남아 있을 때도 “많이 아프지?”와 같은 말은 없이 계란후라이 하나를 조용히 내밀던 사람이었다. 안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이면 아빠는 늘 삼각지쯤에서 잘 들어갔냐며 건강 챙기라는 짧은 전화를 남기곤 하였는데, 그것이 아빠가 내게 마음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아빠가 어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한참 동안은 아빠를 미워한 시간도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아빠 앞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 예의에 어긋나는 말 한마디라도 할까 괜히 몸을 움츠렸고 그렇게 쌓인 긴장은 결국 짙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 상처를 나 혼자 넘어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독립을 하고 나서야 나는 아빠를 ‘아빠’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집안의 가장으로, 할머니의 둘째 아들로, 최길수라는 이름의 한 사람으로. 그러다 시간이 더 흐르면 언젠가는 아빠에게서 받은 상처를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막연히 그려보곤 했다. 내가 낳은 아이를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아빠는 애정 앞에서 늘 서툰 사람처럼 보였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자식의 자리에서 조금씩 마음을 건네고 싶었다. 시간을 들여 사랑을 표현하다 보면, 오래 품어온 상처도 언젠가는 아빠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믿었기 때문이다. 축축한 원망으로 아빠를 물들이기보다는 끝없는 사랑을 택했고, 그러다 보면 우리의 무뚝뚝하고 굳은 관계도 결국엔 조금씩 부드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다 꺼내 보이기도 전에 아빠는 너무 이르게 내 곁을 떠났다.




2025년 12월 1일, 아빠가 먹고 싶다던 재래김이 도착하던 날. 아빠는 세상을 떠났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 김 하나를 제때 보내지 못했고, 결국 한 장도 드시지 못하고 가셨다. 그 사실이 왜 이리 가슴 깊이 사무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네 식구가 둘러앉아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더는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코끝이 자연스레 찡해온다. 아직도 나는 아빠가 늘 하던 리듬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무슨 일 있었어?” 하며 말이다. 집 안에 남은 아빠의 익숙한 기척이 너무나도 또렷하다.


장례식장에서 읽었던 편지처럼, 나는 죽는 날까지 평생 최길수의 딸 최다은으로 살 것이다. 그리고 부디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로 남고 싶다.


아빠가 맛있다던 김을 한 조각 입에 넣어 본다. 입안 가득 짠맛이 번진다. 슬픔의 맛일지도 모르겠다. 김이 이렇게 짠 음식이었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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