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키가 큰 여자는 구경거리의 대상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서 키 큰 여자는 유니콘 혹은 몬스터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거리를 걸으면 나를 보고 흠칫 놀라거나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길들여져야 했다. “키가 몇이야?”, “키가 몇이세요?”와 같은 아주 무난한 질문부터 “어우, 아가씨가 왜 이리 키가 커.”, “여자는 키가 너무 크면 못써”와 같은 오지랖 넓은 말들 그리고, “모델하면 딱이겠네.”, “농구하면 잘하겠네.”, “배구 선수 누구 닮았네.”와 같은 무례한 말들까지. 나는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길가에서 마주친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듣기 일쑤였다. 처음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라 그저 실없는 웃음으로 가벼이 넘기던 나도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자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초면에 그런 말들을 뱉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무척 나빴다. 어느 날은 그런 말들에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느덧 내 나이 스물여섯.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제 그런 시선들과 말들에 더없이 익숙해졌고 면역이 생기게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지만, 그런 상황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된 게 제일 큰 것 같다.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 남을 함부로 평가하는 말이 실례가 된다는 인식 또한 영향을 미친 것도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그런 시선을 받는다는 걸 주변 지인이 굳이 알려주지 않으면 잘 체감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그런 말들을 들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여유 또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키가 커서 제일 안 좋은 시기는 뭐니 뭐니 해도 학창 시절 때일 것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친구들과 같은 것을 추구하는 학창 시절은 키 큰 여자에겐 정말이지 쥐약이다. 내가 중학교 때, 또래들 사이에선 청 스키니 진이 굉장히 유행이었다. 그래서인지 거리엔 청 스키니 진을 입고 돌아다니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 청 스키니 진은 너무나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남들은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하면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 청 스키니 진을 구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번화가를 1시간 가까이 돌 수밖엔 없었다. 그런고로 허리 사이즈 30의 청 스키니 진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게 맞는 청 스키니 진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청 스키니 진의 컬러나 디자인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른 선택지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내게 맞는 청 스키니 진을 찾아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시기, 뚱뚱한 사람들을 위한 빅 쇼핑몰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반 쇼핑몰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사이즈(30~36)의 옷들을 판매하는 걸 보고 나는 나름의 대안으로 빅 쇼핑몰에서 바지를 시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온 바지는 가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밑위가 짧고 다리가 긴 나에게 그 바지는 밑위는 길고 길이는 짧아 맵시가 살기는커녕 의도치 않은 배기팬츠가 될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어야 하는 때를 피할 수 있으면 언제나 피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기껏해야 교복 위에 걸치는 가디건, 후드 집업, 낡아빠진 청바지 말고는 내 옷장엔 나를 빛내줄 옷 따윈 없었고, 구하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학창 시절 때 제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사실은 바로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남들보다 키가 월등히 크다는 사실)이었다. 하나의 선두를 만들어 개인의 개성을 죽이고, 모두 다 그것을 좇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는 소매에 튀어나온 실밥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 수밖엔 없었다. 나는 내 친구들보다 큰 사이즈의 교복과 체육복을 살 때 그것이 마냥 창피하게 느껴졌다. 학교생활을 하다 혹여 나의 사이즈를 묻는 상황이 생길 때 또는 옷 안의 사이즈 표가 자연스레 노출이 되었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작아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 남들보다 키가 크다는 사실은 그렇게 나 자신을 항상 떳떳하게 만들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177cm였던 키가 1년 새에 1cm가 자라 178cm이 되었을 때, 나는 이보다 더 키가 크지 않을까 불안했고 키가 크길 바라는 남들과는 반대로 더 이상 키가 크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