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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Aug 09. 2022

여름 예찬 - 사에에게

엽편 소설

 

창을 열었어요. 에어컨과 선풍기도 끄고서 뜨끈한 여름 냄새를 맡으려고 미련하게 한낮의 창가에 앉았습니다. 매미도 쉬는 오후. 한없이 조용한 거리 위로 타르 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구겨진 미간 사이에 여름을 새겨 넣습니다. 당신의 가죽 샌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종이 위에서 몸을 닳는 연필 소리와 닮아서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     


 사에, 느지막이 맹위를 떨치는 뜨거운 기운을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것은, 숨 막히고 현기증 이는 나날이 마냥 좋다거나 여름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우둔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잃을 걸 알고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광이 집착으로 변모하는 과정일 거예요. 눈앞에 절기의 선을 긋고 계절의 변화를 보아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 추스르는 시간이 넉넉히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저는. 그래서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울고 맙니다.     


 곧 푸른 잎이 갈색으로 변해 바닥에 나뒹굴 거예요.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턱까지 바짝 치켜 입고서 표정을 숨길 테죠. 긴긴 여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입니다. 당신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제게 여름이 없는 삭막한 거리를 보는 일은 세상의 종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손톱 틈새를 벌리며 켜켜이 쌓이는 시린 고통과 여름날의 고단함을 비교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저는요, 여린 살갗이 트기 시작하면 덩달아 마음도 시들기 시작해요. 결국엔 여름을 앞뒤로 둘러싼 계절이 아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불속으로 숨어듭니다.     


 저를 닮아버린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겠죠. 우린 여름밤을 수놓은 수많은 사랑이 점멸하다가 희미해지는 것을, 결국엔 식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리란 걸 필연적으로 느끼고, 추하게 붙들다가 난동을 피우는 수밖에 없는 신세예요. 알고 있대도 뭘 어쩌겠어요. 우리가 무얼 바꿀 수 있을까요. 겨울을 좋아하는 이들은 눈사람을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다는데, 여름은 어디에도 담아 둘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우린 어김없이 겨울을 두려워할 것이고, 봄이 오면 여름이 떠날까 미리 염려할 테죠. 눈앞에 있는 것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을 테고, 계절 사이에 끼어 부유하는 것들을 어루만지며 허상의 계절을 찬미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여름이 되기로 했어요. 기다림에 익숙한 제 마음을 잘라 당신께 드릴게요. 당신은 이따금 장갑 챙기는 걸 잊고 밖으로 나가시니 얼어붙어 버린 손을 녹일 때 쓰셔요. 다음 여름이 올 때까지 말이에요. 그러니 부디 모든 게 끝났다며 울상짓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마음 꾹꾹 눌러 담았으나, 실없는 얘기 같아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어요. 붉은 벽돌이 노란빛에 젖고, 빌딩숲 너머에서 가을 냄새가 납니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계절이 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요. 슬슬 서랍 깊이 묻어둔 옷들에 손을 넣어 휘적대고, 그 까슬하고 눅눅한 ─ 더없이 끔찍한 ─ 촉감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아야 해요.     


 사에,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저는 여름날 하루를 온전히 사유하고도 못내 아쉬웠습니다. 어두워진 길 건너에 당신의 모습을 기다리다가 열린 창으로 들어온 모기들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나서야 여름이 끝났음을 알게 됐어요. 그제야 더위가 몸을 훑고 남은 화상 자국을 볼 수 있었고요.     


 “땀에 전 머리 좀 봐. 여름을 제일 증오하는 내가 뭐 하고 있는 거람.”


 나를 두고 떠나가는 모든 게 야속해서 마음에도 없는 볼멘소리를 했어요. 조금 더 머물러 달라고 애원하다가 차가운 물을 세로로 들이붓고 뜨거운 입김을 토하니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됐습니다. 떠날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떠나기 마련이라며 저를 욕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 모를 지경이 되고서야 떠나보낼 각오를 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참 이상하죠. 가로등을 부술 듯 신음을 내지르는 매미들과 열을 뿜어내는 이 거리가 싫다니. 그게 마치 여름의 전부라는 듯 별안간 싫어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니 말이에요. 보낼 때가 되어서야 모든 게 싫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짓이겠죠. 이쯤이면 놓을 만도 한데 도무지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제가 여름에 태어나 여름으로 돌아가는 중이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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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장의 편지가 이어지는 엽편 소설로 전개될 예정이니 다음 편도 꼭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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