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단상
셔츠 밑단을 구기며
침묵은 쉽고 저렴하다. 게다가 효율적이기까지 한데 미련하리만치 사실을 줄줄 털어놓는 이유가 뭘까. 그깟 비열함 조금 쌓인대도 사는 일에 거짓이 끼어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비효율적인 선택지를 고르는 이유야 다양하겠으나, 정적에 익숙해지면 감정의 테두리를 온전히 감각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과정은 순탄치 않다. 불필요한 일에 휘말려 고통받다가 어렵사리 냉정을 배우고, 이따금 특정할 수 없는 무언가(신이나 운명)를 저주하기도 할 테다. 잔혹하게 들리겠으나 그럼에도 우린 사랑을 해야 한다. 무엇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타인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상대에겐 또 다른 나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탈인본주의적인 관점으로 미움을 극복하라는 말이 어이없게 들릴 테지만, 수사하여 완성한 매끈한 설명보다는 거친 편이 효율적이다. 자기애마저 소실했다면, 어디부터가 온전히 자신의 감각인지 알기 위해 선행되는 효율 나쁜 재활에 관한 변론에 불과하겠지만.
색바랜 입술이 물을 때 나는 조용히 웃곤 하는데, 그대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으레 ‘잘 지냈니, 잘 지냈어. 나도 가끔 엉망이고 예민해.’와 같은 싱거운 문답이 오고 갈 것이다. 같은 듯해도 매번 다른 이야기. 나는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이 많은 점을 무기로 삼겠으나, 뙤약볕에 오므라드는 이파리처럼 셔츠 밑단을 구기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말랑한 마음이 어느 순간 굳어야 하는지, 망가졌다면 어떻게 고쳐야 좋을지, 타인을 효율적으로 배척하는 방법이라던가 하는 자잘한 얘기부터 살아온 삶의 일부와 전부까지 한순간에 이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은 난처해져도 빳빳한 마음에 손을 뻗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오만한 확신은 대개 인과를 이탈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나 갖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인 단절할 수 없는 욕구에 사고가 잠식되고 만다. 잔잔한 마음은 지그재그로 요동치고 요철이 생겨 당혹스러움을 설렘으로 착각한다. 99% 확률의 안정적인 해답을 부정하며 1%의 의외성에 목매는 일이다. 급진적인 논담에서 찾은 이치가 정상적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보다 큰 가치가 있다는 듯. 면목 없으니 끝끝내 정갈한 마음에 주름을 내는 이유를 온갖 피상적인 ─ 데다가 마땅히 익숙해졌을 ─ 해결 법칙을 부정하려는 체제를 향한 도전이라고 해두자. 한없이 실패에 가까운 시도를 하며 난해한 설명과 애매한 해결을 원하는 괴팍한 성미는 가능성이라던지 손익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자기 파괴본능에 가깝다. 파괴를 향하면서도 바람 하나있는데, 격정을 피할 수 없다면 온정이니 배려니 하는 마음들이라도 여기에 함께 묶어두고 싶다.
역설적으로 넉넉히 괴로움을 견딜 수 있기에 고통을 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내구성을 오판하여 육신이 죽는 해프닝이 일어난다는 게 퍽 우스꽝스럽긴 해도, 현대 사회에 속한 우린 고통을 제대로 감각하지 못하므로, 슬픔ㆍ아픔 등의 <픔>으로 끝나는 차가운 것들에 들러붙은 허연 기름 덩이로 정도를 유추하는 게 고작이니 별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모한 시도를 반복하고야 마는 그대에게 전한다. 고통의 정도를 수치로 환산할 수 없어 어느 때에 소리를 질러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지금처럼 멍한 상태로 지내는 것도 좋겠다. 비교적 안전한 호숫가를 걷고(○) 골짜기에서 불쑥 튀어나온 주홍의 빛살과(╆) 풀숲의 윤곽을 눈으로 훑으며(△) 행복이라고 확신해도 좋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다면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충분하다. 애당초 그대가 말하는 공공의 행복이란 잘 다려진 셔츠를 걸치고 보기 좋게 구겨진 얼굴로 눅눅한 숨을 나누는 도피 행위에 불과하니까.
내 말을 듣고 난 그대가 웃는 모습은 무척 멋지다. 그러나 희망찬 사람 연기하는 모습을 마주 보는 것만큼 마음 괴로운 일 없으니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겠다. 웃음이 쓰든 떫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여 어느 시점엔 해결에 다다를 것이다. 그 선택이 고통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여도.
2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