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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막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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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흐름 Sep 22. 2022

사랑할 때

크리스



크리스가 나더러 왜 넘어졌냐고 묻는다.

그러게. 이렇게 다 커서 오랜만에 제대로 넘어졌네.

정신 놓고 있다 익숙한 것에 한 방 먹은 어른처럼

그를 만나러 가는 길 횡단보도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터였다. 얇은 여름 바지를 걷어올리니 피 맺힌 무릎이 드러났다. 손바닥도 긁혀 피부가 벗겨져서는 양손을 어쩔 줄 몰라 허공에 마냥 들고 있었다.

그가 사무실에서 부랴부랴 구급상자를 찾아와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는 무릎을 소독해 주었다. 활짝 편 손에는 반창고를 넉넉히 붙여 주었다.



호주에 이민해 살다가 한국 나와 9년을 일하고 2017년도에 다시 호주로 돌아갔다. 우울증으로 온몸과 정신에 멍이 들어 돌아갔을 때 심리상담가인 크리스를 만나 2주에 한 번씩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 더디면서도 서서히, 치유의 문이 열렸다.


크리스와의 상담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금세 우리의 마지막 상담 날이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우울했고 그는 그날 무얼 꽤나 망설이고 있었다. 상담에 전혀 집중을 못하고 엉덩이가 달싹이는 모습이었다. 자꾸만 '오늘이 우리 마지막 날인데 앞으로 못 볼지 몰라요.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했다.


그는 노력했다. 상담자가 피상담자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마 직업적 윤리 위반이 되는지, 자기 스스로 내 개인정보로 연락을 취할 순 없으니 어떻게든 내 입으로 본인 연락처를 물어보게 하려고 했다. 나는 묻지 않았다.


그는 피상담자에게는 주지 않고 사업 파트너들과 교환하는 자기 명함을 몇 번을 꺼냈다 넣기를 반복하다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친절히 설명까지 해주었다. 피식. 속으로 웃음이 났던가.

상담 시간이 끝났는데도 그는 나를 붙들어놓고 자신의 신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본인의 나이며 심지어 본적, 부모님의 인종까지 풀어놓고 있었다. 나는 찬찬히 명함을 들여다보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에게 명함을 돌려주었다.


나는 아직 멍든 채였다. 피상담자 중 하나로 잊혀지고 싶었고 내 우울함이 그 사람 앞에 어둡게만 느껴졌다. 상담은 일이라 일로 하겠지만 실제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우울하면 그에게 폐가 될 것 같았다.


느꼈다. 어느 날은 절절할 정도로 그의 마음을 느꼈더랬다. 호감을 넘어서 애정 어린 눈빛 하며, 눈을 넘어 마음으로 온전히 날 바라보곤 해서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혹시나 연민이 바탕이 되는 마음일까 봐 그런 마음은 왠지 모른척하고 싶어서 그에게 그렇게 안녕을 고했다.


오늘까지 그 이후로 몇몇 인연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미안하고 고맙게도 그들에게 사랑만 받았다.

오늘, 크리스가 보고 싶으라고 그랬나 보다.


크리스가 보고 싶다.

나는 아프지만, 더 이상 우울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노래가 다시 아름답게 들리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할 때이기 때문에.


내가 부디 사랑을 위해 기꺼이 애쓰기를.


정신을 쏙 빼놓고

한방을 먹여줘.

아님 내가 먹일 테야.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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