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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흐름 Aug 30. 2023

축복에 말뚝박기, 더 큰 신을 만나는 곳

[성경] 창세기 11장 10절~ 12장 9절



성경 창세기 11장~12장을 읽는다.

'아브람'이란 사람이 새로이 등장한다. 신이 세상을 한 번 홍수로 쓸어버리고 생명에게 새로운 번영의 기회를 준 이후 태어난 사람으로, 홍수 때 살아남은 노아의 아들 중 '셈'의 후손이다.

때는 아브람이 '하란'이란 땅에 살 때이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데라'가 아브람을 비롯한 가족 일부를 데리고 고향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다가 정착한 곳이다. 신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그곳(고향, 친족, 네 아비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네가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히 되는 복 줄 터이니, 너를 복 주는 자를 복 주되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할 것이며, 온 세상 사람들이 너로 인해 복 받게 될 것이다."

주(신)의 뜻을 받들어 아브람이 길을 떠난다. 아내인 '사래'와 아비 잃은 조카 '롯', 그리고 하란에서 쌓은 재물 및 얻은 사람들을 다 이끌고 가나안에 이른다. 가나안 땅을 나아가며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에 닿으니, 주가 나타나 그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겠다 하신다. 그러자 아브람이 곧 제단을 쌓아 그곳에서 신에게 드리고, 계속 나아가 '벧엘'과 '아이' 사이 언덕에 장막 쳤을 때 또 주의 제단을 쌓는다. 그리곤 계속 '네게브' 쪽으로 나아간다. 아멘.




12장에서 아브람은 신의 명을 받아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 무렵에는 세상 사람들의 부패가 다시 성해 가고 있었지만 신은 어찌 되었든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모조리 한꺼번에 홍수로 정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그러니 아브람으로 하여금 좋은 세력을 늘려가려는 계획이 있으셨던 것 같다.

신의 명이란 그냥 실행하라는 요구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축복이 함께 따라왔었다. 지구를 리셋하는 홍수 사건 때에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지시하며 그 가족과 생명을 살리고 번영케 하는 축복을 같이 주셨음에, 이번에 아브람 역시 커다란 축복과 신의 가호와 함께 나아간다.

 

아브람은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본문에 신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하나, 고여있지 않고 신의 말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자이며 고향, 친족, 아비의 집이라는 안락함 보다는 신이 더 중요한 자,

둘, 내면의 땅이 크고 지도자의 능력이 내재되어 있으면서 이름이 창대히 되어도 신 앞에 제 이름 내세우지 않을 자,

셋, 신이 그의 편을 들어도 될 만큼 신의 편에 서 있는 자,

넷, 축복의 매개체로 영향력을 가져도 안전할 자.

위처럼 확대해석하지 않아도 어쩌면 그는 단순히 는 '신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자'였던 것이다. 그만하면 무엇이든 되도록 신이 인도해 갈 수 있는 사람.  


한편 큰 세상과 큰 민족으로 나아가는 아브람 앞에 '크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넓고 크기가 큰 것, 숫자가 많은 것?

크다는 것은 깊이와 입체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때, 세상과 사람들 틈에서의 깊이와 입체감은 깊은 산전수전을 의미하는 것. 아이고. 고향을 떠날 당시에 그가 이미 신의 비전에 부합하는 역량을 갖췄을 리는 없을 테니, 그의 앞에는 큰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훈련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 두둥!


성경적으로 볼 때, 아니 신의 존재를 중심에 놓고 볼 때는, 크다는 것의 핵심은 바로 '신과의 관계'이다. 신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신과 사람 사이 신뢰의 깊이, 또 신을 따르는 순종과 뜻을 실행하는 것이 크기가 된다. 곧 신의 뜻과 얼마나 일체감을 갖느냐. 아브람은 개인적으로 신과의 큰 일체감을 향해 나아가며 그 경험 속에서 사람과 신을 민족 안에서 일체감으로 연결하는 임무를 진 셈이다. 비록 더 큰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나, 신과의 관계가 단단하면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 아닐까. 신이 든든한 힘 줄 터이니. (반면, 든든한 힘이 없다고 느껴지면, 그것은 신과의 관계가 단단치 않은 것일 테고.) 성경의 역사 속에서 그가 신의 힘과도 얼마나 일체감을 가지는지 보게 될 것이다.  


더 큰 곳으로 나아가는 아브람의 태도는 자신이 밟은 땅 곳곳에 제단 쌓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주가 자신을 통해 이루신 성취를 기리고 자기 몫의 축복에 말뚝 박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제가 당신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의 가호와 축복에 감사합니다. 축복 잘 받았습니다'하고 확실히 받들고 확실히 받는 것.


잠시 내 있는 자리를 돌아본다. 이것이 나에게 당연한 풍경인가?

 사는 것이 못마땅하고 괴로워서 신에게 '어쩌면 그렇게 잔인하냐' 울부짖던 때가 떠오른다. ' 소원 먼저 들어주면 당신께 잘하겠다' 무릎 꿇고   모으던 장면들도 떠오른다. 젠장. 내가 바라던 것을  의지로 밀어붙여 소원 이루었을  내가 인간적으로 선택한 당시의 장점들이 지금의 부작용이 되고 있는 것을 시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반면 당시에 잔인하다고 느꼈던 신의 목소리는  뜻을 따르고 나니 얼마나 반전의 축복이 되었던가. 주의 의로우심으로 선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나온 것을 생각하면 하유. 산전수전의 세월이여.

아무튼 나도 '주여, 저도 여기까지 닿았습니다. 그 안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줄을 믿습니다. 당신의 가호와 축복에 감사합니다. 축복 잘 받았습니다'하고 기도하고 신이 주신 축복에 말뚝을 박는다.

신이 천지를 창조하며 생명 있는 것들에게 준 절대적인 축복 '열매 맺고 번성하라'에 일체. 그리고 모든 영광은 축복의 근원이자 종착지인 신에게로.


아브람 앞에도, 그리고 우리 앞에도 더 큰 세상이 놓여있다.

결국 더 큰 세상은 더 큰 신을 만나는 곳. 신과 더 크게 관계 맺고 일체 하는 곳.

주의 의로운 뜻에 맡기고,

그가 주신 축복에 말뚝 박고,

계속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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