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흐름 Sep 12. 2023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성경] 창세기 16장




성경 창세기 16장을 읽는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브람에게 자신의 몸종으로 하여금 자식 가질 것을 권한다. 본처인 자신은 도무지 아이가 생기질 않으니, 이집트인 몸종 '하갈'을 통해 후손을 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하갈을 남편의 첩으로 주어 임신하게 한다. 문제는 첩된 하갈이 아브람의 아이를 갖자 자신을 업신여기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남편에게 따지고 드니, 아브람이 하갈을 다시 부인의 몸종으로 준다. 그리고 사래가 하갈을 괴롭히니 하갈이 아이 밴 채로 도망한다. 

한편 주(신)의 천사가 도망친 하갈을 사막의 샘에서 찾아내어 묻는다.

"사래의 여종인 하갈아,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갈이 말하기를,

"제 여주인인 사래로부터 도망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에게 다시 돌아가 사래를 모시기를 이르며 자손이 무수히 많게 해 주겠다고 축복해 준다. 그리고 예언하기를,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 이는 주가 너의 고통을 들으셨음이다. 태어날 아들은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되어 사람과 형제들과 대적하여 살 것이다."

그에 하갈이 주를 '나를 봐주시는 신'이라 부르며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신을 여기서 뵈었나이까 한다. (그때 하갈과 천사가 만난 사막의 우물이 '브엘라해로', 곧 '나를 봐주시는 생명 되는 분'이라 이름 붙는다.)

후에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아멘.





창세기 16장에는 여전히 아브람이 신의 민족을 만들어가는 여정 중에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인간적인 관습과 신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 그는 부인 '사래'의 말에 휘둘려 사람의 관습대로 첩을 통해 아이를 낳는데, 이로 인해 주가 아브람의 순혈통(아브람과 사래 사이의 자손)으로 후손 주겠다 한 약속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이 뒷전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그 약속이 이루어질 줄 알겠는가?

사람은 자신에게 한계를 걸기 때문에, 그 스스로 세운 한계의 한계에 걸려서 넘어지게 된다. 또는 남이 나에게 대신 걸어주는 오지랖 한계. '나는 나이가 많으니까 이 나이 됐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이만큼 기다렸으면 이게 내 인내심의 한계야.' '너는 못해. 시간 없어. 다른 방법으로 해. 딴 사람들 봐봐. 신은 무슨 신이야.' 정도만 해도 조바심, 비교, 의심의 주문에 걸리게 된다. 신은 자신이 한 약속을(사람이 우기는 욕망 말고) 한참 지금 이루어가는 중이며 때가 차기를 기다리는 중인데도, 사람에게는 자기 손목에 찬 시간이 중요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사래의 몸종 하갈이 아브람의 첩이 되어 아이를 갖는다. 하갈이 사래를 멸시함은 아브람 부부가 자초한 것이며, 하갈이 도망치는 신세가 되는 것은 하갈이 또 자초한 것이다. 그래도 하갈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한 것은,  아브람이 성취해가는 신의 임무의 여정에 있어 하갈이 해야할 역할이 있고, 하갈 역시 사막을 헤매기 보다 그 아래서 이제 태어날 이스마엘과 살려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던 아브람의 반쪽 혈통 아이를 자신의 의지 없이 가졌으니 이를 보살펴 주가 하갈을 축복해 준다. 비록 이스마엘이란 아이에 대한 예언은, 아브람과는 이방 되는 이집트의 혈통을 반을 따르니, 그 피가 당시 사람들이 서로 대적함을 반영하여  삶으로 드러나는 것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 겪게 되는 것. 게다가 들나귀는 주인 없이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로, 하갈이 종노릇 하며 자기 주인과 대적하며 속으로 그리 염원했을까, 혹은 그리 아이를 키울까 가엽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천사가 하갈에게 했던 질문을 이스마엘에게 던져 보면 그 아이는 무엇이라고 답할까.

"사래의 여종 '하갈'과 큰 민족의 지도자가 될 '아브람'의 아들아. 아브람과 이집트의 피가 섞인 자, 들나귀 같은 자 이스마엘아,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나는 뭐라고 답할까?


나는,

"내게 조상과 예언이 무슨 수식어를 붙이든 상관없이 

나는 창세에 주가 당신의 이미지로 빚어 생명준 '사람'의 자손이자, 

주가 '노아'로 하여금 다시 사람에게 준 생명의 기회로 

조상의 죄로 인해 한낱 한 줌 흙 되어 땅으로 돌아갈 자가 아니고,

신이 애초에 사람에게 내리고 여러 번 반복하여 내린 축복, '열매 맺고 번성하라'의 실현으로서

신의 축복에서 와서 그것을 이어받고 그 축복으로 갑니다. 

그리고 신의 숨결에서 와서 신의 숨결로 돌아갈 것입니다."

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전의 역사가 어떠하든 나는, 신의 의에서 온 자로 신의 의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 나는 내 앉은 이 자리와 창세기 16장을, 

내가 하갈이 만난 천사를 만난 자리로 여기고,

이곳을 내가 '신의 축복의 순혈통으로 돌아가는 자리', '신의 의로 나아가는 자리'라고 칭한다.

그리고 나아간다. 아브람처럼 사람의 관습에 걸려 갈팡질팡하더라도 신의 가호와 인도를 받고 신의 인내를 받으며. 


궁금하다.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십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때와 정체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