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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ug 05. 2020

나 대신 슬퍼하는 너

엄마가 되기 전에 슬픔을 지나갔어야 했다.

엄마가 되는 마음공부를 미리하고 엄마가 되었다면 조금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첫째를 키워본 경험이 둘째와 셋째에게 영향을 끼치며 마음이 조급하지 않은 육아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막내의 경우 대부분의 과정을 첫째나 둘째를 통해 겪었기에 무엇을 해도 '응~ 그래... 그럴 때지....'하고 넘어가게 된다. 울어도 생떼를 부려도 무엇을 원해서 하는 행동인지 훤하게 알 수 있다. 들어줄 수 있는 요구라면 즉시 충족시켜주면 되고 아니라면 단호하게 거절하면 된다. 덕분에 아이도 빠르게 받아들이고 뒤끝이 길지 않다. 


다섯 살이 된 둘째는 한창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다. 즐거울 땐 끝없는 텐션을 자랑하고 갑자기 너무 서럽기도 하다. 누나, 동생과 비교하며 시샘하고 원하는 것도 명확해졌다. 엄마의 "안 돼"가 심하게 서러워 세상을 잃은 듯이 울고 소리를 지를 때도 있다. 

첫째가 이 시기를 지날 때는 당황스럽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었다. 달래도 보고 다그쳐도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속상해서 같이 울었던 날도 숱하게 많았다. 결국 시간이 지나 스스로 감정을 알아차리고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기다려주려면 엄마가 해당하는 감정을 다 겪어내고 해결했어야 한다는 것도 최근 알아차리고 있는 중이다.


어쨌거나 첫째를 키우며 지나간 경험 덕분에 둘째가 때로 보이는 심한 감정 표출에도 엄마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속이 상해서 끌어안고 울며 "엄마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니." 따위의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고 지나가길 기다려준다. 그리고 해줄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게 끝이다. 


둘째, 셋째의 양육태도가 일관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첫째의 육아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 때도 조금 더 준비했다면 시행착오를 겪는 횟수가 줄어들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라도 조금 더 공부하고 준비하면 앞으로 닥칠 첫째 육아의 고비를 조금 더 여유롭게 지나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육아서를 다시 펼쳐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 안에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남아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Photo by Jon Flobrant on Unsplash



한동안 육아서를 읽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꼭 육아서가 아니라도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참고할 만한 책은 많다. 그러다 이젠 다시 육아 관련 서적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그대로 두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추천을 받은 책이 <푸름 아빠 거울 육아>이다.



소개받을 때 쉽게 읽히지 않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다. 아마 다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육아서가 어려워봐야... 조금은 쉽게 생각했었다. 막상 열어보니 한 챕터를 지나가기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읽고자 한다면 하루 이틀이면 읽을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이고 쓰인 문체나 내용도 어렵지는 않다. 그런데 진짜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 문장을 읽고 생활하다 보면 몇 날 며칠을 한 문장을 곱씹게 된다. '이거구나.'  '아!' 깨닫고 돌아보느라 책이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글을 쓰겠다고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한 문장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로 글을 쓰는 것이 맞는가. 계속된 의문이 있지만 글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쓰다 보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아이들 중에는 유독 우는 아이들이 있다. 아무리 달래주어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공감받은 아이들은 잘 울지 않는다. 울어도 잠깐 울고, 울고 나면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기에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뛰논다. 그런데 엄마의 내면에 슬픔이 있다면, 아이는 엄마의 슬픔이 다 해결될 때까지 운다. p.21


첫째는 유독 많이 울었다. 지금도 참 많이 운다. 매사에 감정적이고 참 잘 우는 아이를 보면서 남편은 농담 섞은 말로 "네가 뱃속에 있을 때 네 엄마가 그렇게 울어서 그래."라고 했었다. 실제로 첫째가 뱃속에 있을 때 살고 있는 집에 하자가 있는 것도, 경제적으로 힘듦이 찾아온 것도 다 내 탓인 것만 같아 참 많이 울었다.


책의 첫 챕터에 나오는 '아이는 엄마의 내면에 소화되지 않은 감정을 꺼내서 해결될 때까지 자극한다'는 말이 너무 공감되면서 동시에 미안했다. 분명히 내 안에는 소화되지 않은 슬픔, 분노가 있다. (분노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리고 정확하게 아이는 그것을 자극했다. 그게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어떻게 숨겨놓은 감정인데 그걸 건드려. 돌아보니 슬픔이 자극될 때도 분노가 건드려질 때도 스스로 이성을 잃었다 생각이 들 정도의 반응을 했다. 그걸 깨닫고 인정하는데 책을 읽고도 보름이 넘게 걸렸다.



친정 아빠가 돌아가신 지 2년이 지났다. 아빠랑 풀지 못한 많은 감정들이 꼭꼭 눌러 담은 저 깊은 곳 어디엔가 있음을 알고 있다. 꺼내보고 싶은 마음도 꺼낼 용기도 지금은 없다. 그래서 가끔 그립고 많이 아쉽지만 마음속을 건드려가며 아빠를 떠올리진 않는다. 


"엄마, 나는 하늘을 보면 슬퍼."

딸아이는 종종 이런 말을 하면서 눈물을 보인다. 왜냐고 물어보면 하늘을 보면 하늘나라에 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슬프단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슬프다는 것만 아는 거라 생각했다. 첫째는 뱃속에서 얼굴도 못 본 친할머니의 장례를 치렀고, 어느 날 갑자기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시는 걸 지켜본 아이다. 어느 날부터 아이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면 어쩌지, 아빠가 일찍 돌아가면 어쩌지를 걱정했다. 놀다 말고 외할머니가 돌아가면 안 된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아이는 죽음을 돌아간다라고 표현한다) 


매번 그럴 때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엄마는 정말 오래오래 쌩쌩이 곁에서 살아있을 거야."라며 다독이기만 했다. 그런데 아이는 그걸 걱정하는 것이 아녔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마음속에 슬픔을 이제 꺼내요. 슬픔을 털어내고 우리를 제대로 바라보고 사랑해주세요. 엄마가 우리 곁을 일찍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꺼내놓고 털어내세요. 그래야 두려움에 갇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아이는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엄마가 되기 전에 마음공부를 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나를 바로 세웠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이 많은 슬픔을 아이가 알아채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 준비되지 못한 엄마라 아이가 많이 고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첫째와 다르게 둘째와 셋째는 감정을 표출하고 뒤끝이 없다. 책에 쓰인 대로 울어도 잠깐 울고, 울고 나면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짐작하건대 첫째를 키우며 보낸 시간들로 내 속에 있는 0~8세까지의 감정은 소화가 되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 같다. (물론 태도상의 여유로움도 다르겠지만 여기서는 감정만 생각해 본다.) 그럼 앞으로 다가올 시간 속에 숨겨두었던 소화되지 않는 감정들은 먼저 꺼내보고 소화해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슬쩍 쳐다만 봐도 아픈 몇 가지 두려움과 분노, 슬픔과 억울함 등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일 년이 걸려도 이 책을 다 읽지 못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차근히 읽어가며 진짜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하면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이 되겠지. 내가 소화하지 못한 감정 때문에 아이의 삶을 더 이상 고단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딸아, 미안하다. 내 몫까지 슬퍼하도록 내버려 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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