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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Oct 07. 2020

책을 깨끗하게 읽은 이유

feat. 메모 독서법

과거의 나는 책을 정말 깨끗이 읽었다. 책을 읽으면 펼쳐지면서 생기는 자국이 싫어서 손가락을 끼워가며 살살 달래듯 읽은 기억이 난다. 그렇게 '깨끗하게 읽고 깨끗하게 잊었다.' 오랜 시간 독서를 했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 독서를 했다.


더 이상 그런 우를 범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내가 읽은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약하여 쉽게 나누겠어!'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요약보다는 감상을, 생각보다는 느낌을 더 많이 실은 글을 과연 서평이라고 해도 좋을지, 내게 서평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이처럼 쓰고 있지만 아득하게만 존재하는 환상 같은 거였다. 


아이들이 쓰는 독후감이라고 해도 우스울 만큼 넋두리 같은 글들을 토해내면서도 나에게도 남에게도 남는 독서를 늘 꿈꿨다. 그렇게 찾아든 책이 <메모 독서법>이다.

저자는 책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하라고 한다. 샘플로 저자가 읽은 책들은 여백에 여러 가지 메모들과 기호, 도표들이 보인다.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생각, 연관되는 할 일, 요약, 핵심 키워드 등 메모의 종류도 다양하다.


읽으면서 문득 '나는 왜 이렇게 책을 깨끗이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큰 아이를 보면 긴 지문의 문제집을 풀거나 어려운 책은 줄을 그어가며 읽는다. 그래야 눈에 더 잘 들어온다나... 되짚어보면 분명 어린 시절 나도 줄을 긋고 낙서를 하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었다. 그럼 언제부터 왜 이렇게 깨끗이 읽은 것일까?


Photo by Jan Kahánek on Unsplash


문제는 글씨였어!


한 번쯤 아니 그보다는 많은 횟수로 독서를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어딘가 끼적이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따로 노트를 마련해서 나름의 독서 노트를 작성을 해보기도 했다. 몇 번 시도를 해보니 금방 한계가 느껴졌다. 노트로 옮겨 적으려고 하면 페이지만 표시해서는 메모가 너무 생뚱맞다. 책의 내용을 옮겨 적어야만 맥락이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책을 옮겨 적고 하고 싶은 메모 한 줄을 적고 나면 피곤하다. 이 짓을 내가 왜 하지? 아마 그렇게 몇 번 귀찮다는 생각을 하고부터 노트에 메모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서 문제! 책에다 바로 적으면 될 메모를 굳이 노트에 옮겨 적은 이유가 뭘까? 고백하자면 나는 연필을 바르게 잡고 쓰지 못한다. (비슷하게 젓가락질도 잘 못한다.) 거기에다 또박또박 보기 좋은 글씨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괴발새발 나만 겨우 알아봄직한 글자 모양은 평생 가지고 온 콤플렉스다. 그런 못난 글씨를, 다음에 읽어도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책 여백에 남겨 누군가, 혹은 다시 읽는 내게 보이는 것이 싫었다. 부끄러웠다. 예쁘지 않은 흔적은 가능하면 남기고 싶지 않았다.


같은 맥락으로 대학교재도 참 말갛게 유지하다 버렸다. 책에 뭔가를 많이 쓰면 나중에 보기가 싫었다. 예쁘지도 않은 글씨체, 정갈하게 요약정리도 못하는 바보. 그래서 나는 늘 강의 노트를 따로 가지고 다니며 마구잡이로 쓰고, 그 후로 아주 심각하게 몰라서 참고를 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쳐다보지 않았다. 당연히 요약정리 실력은 더 퇴화했고, 이런 거 못해도 사는데 지장 없다며 스스로를 달래고 눈감으며 살아왔다. 최근 내가 가진 콤플렉스에 대해 깨닫고 난 후 책을 읽으니 메모를 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요즘 읽는 책은 제법 지저분하다. 각종 형광펜으로 그어진 밑줄. 상황에 따라서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이의 색연필이나 연필로 줄을 긋기도 한다. 귀퉁이에 보기 싫지만 단어 단어로 한 두 마디씩 적어두기도 한다. 부족한 건 포스트잇을 붙여 보완하고, 에버노트로 정리하면서 살을 붙이고, 재독하면서 정리하기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표하는 남는 독서를 할 방도가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 되는 건 없다. 미운 내 모습도 받아들이기.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돌아보니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족하고 어설프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오늘 분의 글도 쓰고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생이 많이 바뀌었겠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늘 그렇듯 지금이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렇게 오늘도 미운 나의 글씨채를 바라보며 '그래도 이제는 대강 알아볼 수는 있게 쓰네.'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려 한다. 이것도 자꾸 연습하면 좋아지려나... 희망을 품으며 슬쩍 만년필을 주문한다. 뭐든 해보자! 매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문장, 남기고픈 문장을 필사하면서 꿩 먹고 알 먹고 배부르고 살찌고까지 해볼 작정이다. 이왕이면 살이 포동포동 올라 보기 좋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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