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콕맘 예민정 Oct 08. 2020

같이 죽자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부디 이로운 사랑으로 자신을 아껴주시길...

어릴 적에는 아니 꽤나 나이를 먹어서도 사랑은 애타고 절절한 사랑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 사랑만 사랑인 줄 알았다. 소설, 드라마, 영화 속 사랑은 약속이나 한 듯 너무 뜨거워서 상처를 입히고만 마는 것들 뿐이었다. 그건 현실이 아니라고 누군가 이야기해줬다면 내 어린 시절은 좀 바뀌었을까?



로판(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을 읽으면서 어릴 적 읽던 소설들이 생각났다. 대부분을 대여점에서 빌려보았기에 지금은 찾기 힘든 것들이다.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는 책이 바로 <나일에 피어난 사랑>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그나마 1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2권만 살아남아 친정 책꽂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이야 타임 슬립, 환생은 로판의 기본이지만 옛날에는 아니었다. 하물며 이집트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는 금발의 어여쁜 여자 아이(아무리 봐도 아이다.)가 몇 세기를 넘어 고대 이집트로 흘러가는 스토리라니. 환상에 환상을 더한 스토리에 푹 빠져서 삽화가 허접하다는 것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니 나는 이런 사랑 이야기를 좋아했다. 늘 가슴이 아파야 하고, 애가 타서 죽을 것 같고.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고 숱한 반대와 방해를 이겨내야 한다. 여자 주인공은 너무 여리고 많이 아름답다. 금방 쓰러질 것 같지만 앙칼진 면이 있다. 대부분의 상황은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위기에서 구해주고 여주(여자 주인공)는 기쁨과 고마움으로 눈물짓는 게 전부다. 빼놓지 않고 꼭 사랑이라고 부르고 집착하는 남자가 나온다. (심지어 남자 주인공도 사랑하면서 집착하고 소유하려 든다. ) 그러고 보니 배경이 어떻든 내가 매료되는 사랑은 비뚤어진 사랑들이었다. 


로맨틱 소설뿐만 아니라 문학 소설도 이런 부류를 좋아했다. 책이 닳도록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지금은 줄거리도 흐릿하기만 하지만 '히스클리프'(<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에 얼마나 마음이 흔들렸던지. 그의 비틀린 사랑과 복수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기필코 이런 남자를 만나 온 삶을 뒤흔드는 사랑을 하고 말리라.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바보 같게도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사랑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랑을 찾았다. 늘 눈물이 가득하고 애가 타다 못해 마음이 뭉그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랑을 했다. 그래서 나는 늘 아팠다. 늘 머리 위에 우울한 비구름이 가득히 달고 슬프고 처연한 웃음을 짓는 것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Photo by Scott Broome on Unsplash


시간이 많이 흘렀다. 요즘 보는 웹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나는 안타깝고 어긋나는 사랑에 몰입하기를 좋아하고, 절절해서 무척 아픈 사랑 이야기에 매료된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는 이야기여서 좋다. 한껏 감정을 끌어올려 흠뻑 빠졌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되게 행복해진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어쩌면 현실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리 민정이가 달라졌어요."


남편과 내가 자주 하는 우스갯소리다. 예전의 내가 우울하고 먹구름이 가득한 비련의 여주인공 캐릭터였다면, 지금의 나는 제법 쾌활하고 웃긴 평범한 단역 캐릭터다. 간간이 우울한 모습이 툭툭 튀어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나도 내 속에 이렇게 웃긴 본성이 숨겨져 있는지 처음 알았다.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보니 이렇게 살기에도 짧은 생을 너무 긴 시간 우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던 건 아닌지 가끔은 후회된다.


그 시절 나에게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고 얘기했으면 알아들을까? 같이 죽자고 덤비는 남자의 속내는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가져'라는 이기심이라는 것을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귓등으로 스쳐버리는 이야기일지라도 자꾸만 행복하고 밝은 사랑을 보여줬다면 조금은 덜 힘들고 아픈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시간이 많이 흘러 다시 읽은 순정 소설(공식 명칭이 순정 소설이다)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줄거리는 기억과 다르지 않는데, 각 캐릭터가 가진 이기적이고 비틀린 사랑방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된다. '으~ 저건 아니지.'


지금도 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는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비틀리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쏟아낸다. 혹시나 나처럼 비틀린 사랑에 빠져 소설 같은 사랑을 꿈꾸는 이가 있다면 (안 들리겠지만) 말해주고 싶다. 그대가 믿는 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랑 중에 하나의 모습일 뿐이라고. 그 사랑을 쫓아 자신을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그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좀먹는 일임을 한 시대를 지나고 이제야 깨달은 어리석은 사람의 충고를 한 번쯤 담아두시길... 세상에는 핑크빛, 화사한, 밝은, 따뜻한 그런 사랑이 훨씬 많다. 나는 그대가 조금 더 행복한 사랑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어리석은 선택으로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깨끗하게 읽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