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잡러 가 되기 위해서
나는 전업 엄마다. 터놓고 말하자면 전업 주부라는 말이 내키지 않아서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찾은 이름표가 바로 전업 엄마였다. 주부라는 단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마구 쓰이는 주부라는 말에 너무도 많은 무시와 아무렇게나 취급해버리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게 내심 싫었다. 단어는 죄가 없다.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불리고 싶었다. 부모님이 축복하며 지어주시고 불러주신 내 이름 석자도 조금씩 잊혀가고 있는데, 이 정도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니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엉뚱한 곳에 치기를 부렸다.
전업이 '엄마'가 되고 보니 씁쓸한 일이 많았다. 안 그래도 좁은 인간관계는 적어지다 못해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말이 통하는 어른 사람과의 대화는 함께 육아를 책임지는 영원한 전우, 남편밖에 없다. 그나마 둘이 몇 마디라도 나누려고 시도하면 금세 아이들에게 각자 붙들리고 만다. 함께 있지만 함께하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남편 혼자 가계 경제를 책임지고 있으니 힘든 시기에도 티끌만 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무능력함에서 오는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이다.
이 외에도 다 적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다시 사회생활을 하는 걸 꿈꿨다. 그러나 하루 몇 시간 파트타임을 불러주는 곳도 없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규칙적인 출근을 약속할 수 없는 현실에 발목이 잡혔다. 돈벌이가 아닌 사회생활은 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 마음을 고쳐먹고 우선 가능한 것부터 도전을 했다.
제일 먼저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갔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신선하고 즐거웠다. 모두가 호의적이었고 그저 성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다음으로 쓰는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갔다. 매일매일을 무엇이건 써내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비록 얼굴을 맞대로 앉아 서로를 알아가는 오프라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온라인상의 유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함께 비슷한 고민을 하고 힘든 순간을 이겨내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는 동질감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다시 인간관계를 회복해나가고 있다.
요즘 나의 관심사는 N잡이다. 보통 회사원들도 N 잡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경제적 능력이 1도 없는 전업 엄마, 흔히 경단녀라 불리는 주부가 N 잡러 가 되고 싶다니.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웃을지도 모르겠다.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여기사 한 영상을 통해 김경일 교수가 했던 말을 빌려본다. "672+735=?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순서대로 문제를 해결한다. 일자리를 더하고 십 자리를 더하고 마지막으로 백자리를 더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돈이라고는 벌어보지 못한 주부가 N 잡러로 가는 길도 이렇게 생각하고 풀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우선 일자리 숫자 덧셈을 먼저 배워보기로 했다.
먼저, JOB이 가지는 의미부터 다시 정의하기로 한다. 사전적 의미, 사회통념을 모른 척하거나 새롭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의 JOB'을 다르게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흔히 직업을 가졌다는 것은 그 직업으로 내가 먹고살 수 있을 경우에만 '직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직업이라 부르려면 그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전문가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안된다고만 말하는 것 같다. 생각이 꼬리를 물면 돈을 못 벌면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이걸 깨버렸다.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꼭 그걸로 먹고사는 건 아니야!'
[이태원 출장요리사, 움직이는 식당]
움직이는 식당이란, 친구 집에 찾아가 그 집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요리를 해주는 일이다. 일의 고단함에 지쳐 울고 있는 친구에겐 가장 풍성하고 따듯한 한밤의 샤브샤브를, 생일을 맞이한 친구에겐 미역국과 불고기, 파프리카 양파 굴 소스 볶음과 조기구이 한상 차림을 선사한 이야기. 요즘 TV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의 감성 버전이었다고 할지.
글을 쓴 이들은 서로 막역한 친구고 선후배여서, 출판 기념회가 끝나고 그날 저녁 다 같이 내 서재에서 처음으로 식사를 했다. 이것이 <장진우 식당>의 첫날이었다. <장진우 식당> p.98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코스대로 그렇게 모든 것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같이 먹는 끼니가 좋아서 식당을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 '이건 내 직업이야!' 하면 직업인 거다. 누가 자격을 부여할 수도 부여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 자꾸만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마음,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제일 먼저 떨쳐내는 것이 내가 N 잡러 가 되는 과정에 필요한 일자리 수 덧셈의 해법이었다. 이렇게 하나를 깨우쳤다. 다음은 무엇이 될는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지만 또 깨지고 배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