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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Dec 04. 2020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방법

한 여름 보리차 같은 아메리카노


식어버린 커피를 데워 마셔본 적이 있다. 처음 마셨던 커피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다. 향도 남아있고 온도도 좋은데 알맹이가 20% 도망간 듯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무던한 남편은 '어디?'라고 되묻겠지만 하여간 느낌이 그렇다.


불타는 열정으로 60일간 매일 글을 썼다. 작가가 되어보겠다고 하던 때도 해보지 않은 일을 했더니 영혼이 다 바스러진 것 같다. 물론 그전에도 글 쓰는 습관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1년을 못 넘기고 지친 것 같다. 늘 이게 문제다. 시작할 때의 열정이 성과를 보기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며칠 전 예여사가 이쯤이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계속하고 있음에 놀라워했다. 그러고 보니 시작한 지 11개월이다. 뭐든 1년을 넘겨본 일이 없었으니 놀랄 만은 했으나 시기가 빨랐다. 모처럼 맞이한 휴식기. 드디어 고비가 찾아왔다. 빈 화면을 가득 채운 커서와 함께 머리도 비상 깜빡이만 켜고 정차 중이다. 덕분에 소중했던 기간을 마무리하는 졸업식에 성심을 다한 글로 참여하지 못해 마음이 번잡하다.


매번 중도 포기를 하는 원인을 '마음 에너지 용량 부족'에서 찾았다. 남들보다 에너지 저장 용량이 작은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했으면 효율적으로 사용했어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경고등이 켜질 때까지 과속으로 달리다가 아차! 하고 멈춰 선다. 다시 달리기 위해 충전하고 다시 뜨거워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식어버린 열정을 다른 일로 불태우려고 두리번거린다. 식은 커피는 맛이 없으니까. 이딴 핑계를 대면서.


[주간 민프로]는 이런 내가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쳐놓은 가이드라인 같은 거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놀랍게도 발행 2주 만에 찾아왔지만 예상대로 오긴 왔다. 비상등을 깜빡이는 머리에게 빡침을 참으며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쓰고 싶은 말이 뭐야?



속상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 보다. 이런 자질구레한 하소연은 쓰기 않겠노라고 전날 밤에도 다짐했지만 결국 징징거리는 말을 토해낼 생각을 하니 손가락이 움직인다.


내게는 꿈을 응원해주는 가깝고 깊이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보다는 멀지만 애정 어린 격려를 보내주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제대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만 같아 속상했다는 걸 글을 쓰면서 깨닫는 중이다.


세 가지의 프로젝트에 참가한 11월이 끝났다. 어찌어찌 결승점을 지났지만 마무리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두 안녕을 외치고 며칠이 지나면 스멀스멀 부끄러움이 올라온다. 남몰래 동료들의 후기를 볼수록 어딘가로 숨고 싶다. 시작할 때의 열정과 함께하는 동안 타올랐던 사랑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진심도 감동도 찾아볼 수가 없다. 생겨먹길 냉혈한이라 그렇다며 버려두기엔 받은 사랑이 너무 크다. 속이 상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다. thanks를 쓰는 내내 멍했다. 겨우겨우 ‘나’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사건과 결심을 끄집어내어 마무리를 했었다. 그간 고마움 들은 다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걸까?


남들이 어벙함을 알아채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어벙하니까. 무서운 건 무심한 이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고마운 걸 몰라서가 아닌데, 그들이 좋지 않아서가 아닌데, 보이는 모습이 어딘가 무심하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딱 그만큼 따뜻한 온정이 느껴지는 후기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찰떡같이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심한 이가 되는 게 두려운 걸까. 실제 무심한 이가 맞는 건가 헷갈린다.


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식은 커피를 데워마시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다시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먹고 싶으면 새로 물을 끓이고 다른 커피를 내린다. 남은 커피는 잘 밀봉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차갑게 마신다. 뜨거운 커피가 얼음을 만나 쨍하고 얼어버린 맛은 없지만(이 맛이 좋아서 아이스를 마시지만), 냉장된 마시던 커피가 가지는 시원함은 또 다른 맛이다. 한 여름 차게 식힌 보리차를 원샷 할 때만 느끼던 개운함을 커피로 맛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다.


보리차를 연상시키는 냉장고 속 아메리카노를 떠올리니, 식은 열정을 지금 불태우지 못하면 또 어떤가 싶기도 하다. 에너지를 가진 게 열정뿐일까? 찾아보면 그리움도 애달음도 간절함도 각자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중 오늘은 예비전력처럼 넣어두었던 약속을 가져온다. 비겁하게 하소연을 하고 말았지만 다행히 비상등이 꺼졌다. 방전된 배터리에 점프 스타터를 연결하고는 시동을 다시 걸어본다. 다시 달리다 보면 무심함도 따뜻함도 스쳐가는 바람이었구나 하는 날이 오겠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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