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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Jan 30. 2021

오늘 또 피를 보고야 말았다.

부주의


나는 자주 다치는 편이다. 수시로 베이고 긁혀 손에 늘 반창고가 붙어있다. 예전에는 ‘내가 늘 그렇지 뭐’ 하며 쉽게 생각했었다. 이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크게 다치고 나서야 조심을 한다. 채칼에 베어 손가락 끝이 절반이나 잘렸을 때는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버렸다. 통계를 내보면 가장 사고가 많은 곳이 주방이다. 그렇기에 늘 조심하려 애는 쓰지만 오늘 또 피를 봤다.


남편 출근과 아이들 아침거리를 준비하느라 빵을 자르다 사고가 생겼다. 빵을 자르다 손가락을 베일 때 어떤 사람들은 깊게 베이기 전에 손을 빼거나 칼질을 멈추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건지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덕분에 제법 깊은 상처가 낫다. 빵 칼이라 그나마 집에서 처치가 가능할 만큼 다친 것이지 주방용 칼을 사용했더라면 응급실을 가야 할 만큼 위험했다.


단순히 부주의한 것이 문제였을까? 부주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부주의하게 된 원인은 따로 있다. 최근 며칠간 수면 패턴이 무너지면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잠이 덜 깨고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 이 상황이 원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았으니 칼에 베이는 순간에도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럼 왜 수면 패턴이 무너지는 상황이 왔을까? 지난주 컨디션이 나빠지면서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 하지 못한 일들은 마음에 빚으로 쌓였다. 한 번에 만회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낮 시간은 내 것이 아니기에 밤 시간을 조금씩 더 사용했다. 처음에는 12시까지, 다음날은 1시, 그다음 날은 2시. 취침시간은 자꾸 늦어지고 몸은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야행성으로 오랜 기간 살아왔기 때문에 매일 한 시간씩 늦게 자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이렇게 돌아보면 결국 사고가 일어나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내가 부주의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라는 걸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Photo by CHUTTERSNAP on Unsplash



요즘 종종 녹차를 마신다. 품질이 좋은 찻잎을 구해 제대로 마시려면 적당한 온도의 찻물이 중요하다. 가스레인지에서 물을 끓이고 적당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찻물이 준비되면 다기에 붓는다. 이 작업을 주방에서 하면 자주 물을 흘린다. 물이 흘러도 대충 닦으면 되는 곳이니 상관없다고 여긴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같은 작업을 책상 위에서 하면 물을 쏟거나 옆으로 흘리지 않는다. 주변 기기에 물이 닿으면 위험하기도 하고, 책이나 필기구가 젖는 것이 싫으니 더욱 주의해서 따르게 된다. 같은 사람이 같은 행위를 하는데도 장소에 따라 주의하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오늘도 녹차를 마시려고 준비하다가 물을 절반 이상 쏟았다. 다친 손이 욱신거리는 상황에서도 물이 끓는 동안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다 사고를 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오늘 되는 일이 없네. 재수 없게.’ 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명백하게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주방은 위험 상황이 많이 생기는 곳이기 때문에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고만 생각했다. 오늘 일을 겪고 보니 원인은 주방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나는 주방에서 물이 끓는 동안 기다리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설거지하는 시간을 멍하니 흘려보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빨래를 개는 시간을 아깝다고 여겼다. 그래서 물을 끓는 동안 그릇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방송을 들었다. 빨래를 개면서 강의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 메일을 확인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쓴다며 으쓱했었는지 모른다.


주방에서 사고가 많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방이라는 공간에서 하는 일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하고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동작 사이에 흐트러짐이 생기고 그 사이로 사고가 찾아오는 것이다.


모든 일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장난감을 밟아 발바닥이 다쳤을 때도 장난감을 제자리에 두지 않은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장난감을 발견할 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내가 문제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그릇을 깨는 일은 옆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녀 주의를 산만하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그릇 옮기기를 고집한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 부주의하게 태어나서 다치는 일이 잦은 것이 아니라 집중하지 않고 딴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부주의(조심하지 아니함)가 원인이 된 어떤 일이 생겼다면 먼저 그 상황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부터 찾아야겠다. 원망하고 비난하기보다 그 상황까지 오게 만든 나는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나면 사고 발생 횟수가 지금보다 더 줄어들지 않을까? 우선 오늘 만이라도 주방에서 시간은 온전히 일을 하는 것에 집중해 보아야겠다.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핑계로 또 어떤 사고가 추가로 생길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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