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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Feb 05. 2021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처럼 날씨가 따뜻해진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늘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잠시 곁에 없었고 속이 조금 불편했기에 산책을 마음먹는다. 현관문을 나서고 보니 블루투스 이어폰을 두고 온 게 생각났다. 다시 돌아갈까 3초쯤 망설이다 그냥 걷기로 결심하고 돌아섰다.



매일 걷던 길. 자주 돌던 공원이지만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들보다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저귀듯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프라인 수업이 불가능해진 체육 진흥원에서는 장비를 대여해 주고 온라인 강좌를 한다는 현수막도 보였다.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바람을 만끽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느꼈고, 오랜만에 나온 산책이라 다리가 금방 뻐근하게 무거워짐을 알아챌 수 있었다. 특이하게 발목보다 골반이 먼저 아파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걸으며 한가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몸이 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미션을 수행해야 다음 스테이지로 갈 수 있는 게임을 하듯 오디오북을 듣거나 동기부여 영상을 들으며 쫓기듯 걷기 바빴음이 생각났다. 걷기 위해 걷는 것인지, 듣기 위해 걷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시간들이다.



비단 걸을 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지옥에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동동거리며 움직인다. 무능력한 사람이라 손가락질할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처럼 동시에 두 가지쯤은 거뜬히 해낸다. 빨래를 개면서 경제 방송을 듣고, 설거지를 하면서 오디오북을 듣는다. 눈으로 아이들을 좇으며 식사 준비를 하고 청소를 하면서 입으로 잔소리를 한다.



남편과 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없다.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이야기를 나눌 때도 커피를 마시거나 걷거나 야식을 함께 한다. 모두가 잠든 밤. 혼자 시간을 보내겠다고 마음먹어도 마찬가지다.



Photo by Janosch Diggelmann on Unsplash


한가롭게 걷다 보니 1년 내내 거의 집에만 있었던 아이가 생각났다. 아직 어린(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둘째와 셋째는 집에 있으나 어린이집에 있으나 노는 게 일이니 상관없다 여겼지만, 학교에 가야 하는 첫째는 왜인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아이는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해 TV를 봤을 수도 있다. 아이 마음은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엄마였다. 나름 자율성을 존중하려 노력은 했지만 TV만 본다며 눈총을 주고, 화내기도 여러 번 했다. 생각해 보면 아이가 멍하니 가만히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또 왜 멍하게 있냐며 TV라도 보라고 닦달하기 일 수였다. 결국 매 순간 학습하기를 종용하지 않았을까?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엄마랑 살다 보니 아이도 멀티플레이어가 다 됐다. TV를 보면서 공작놀이를 하고 동생들과 놀면서 그림을 그린다.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정작 나는 40년을 허송세월을 해놓고, 고작 이제야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며 동동거리면서 말이다. 마음이 급한 건 나지 아이가 아니다. 나에게나 아까운 시간이지 아이에겐 가진 것 중에 제일 많은 게 시간이다. 아이에게 나를 투영하지 않겠다고 백만 번을 다짐해도 여전히 제자리인 곳을 또 들키고 만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꼭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압박하는 곳이다. 자신을 챙기지 않으면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공장 속 컨베이어 벨트와 다르지 못한 삶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최근 1년은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달리지 않아도 된다며 누군가 주신 선물이 아닐까?


“엄마, 나 오늘은 뭐 해야 해?”

“응?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정말?”

“정말!”

"야호!!!!"



아직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마음껏 TV를 보고 실컷 만들기를 하고 무한정 그림 그리는 게 좋은 아이들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것만 해도 괜찮다. 너도 나도 그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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