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글쓰기는 어떻게 다를까
책을 읽고 (input) 글을 쓰는 (output)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뭘까?
아침을 차리는 내내 '오늘은 뭘 쓰지?' '어제 무슨 책을 읽었지?' 머릿속이 바쁘다. 책을 읽으면서 분명히 몇 가지를 메모했다. 일부는 글로 남겨 저장도 해두었다. 그럼에도 늘 그렇듯 노트북을 켤 때까지도 '뭘 쓰지? '는 떨칠 수 없는 고민이다.
우리는 쉽게 소재를 찾지못해 글을 쓰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물론 아침내내 고민한 머릿속을 되짚어봐도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과연 소재가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하는 걸까?
단언컨데 그건 아니다. 소재가 없는 것이 문제라면 서평은 무척 쓰기 쉬운 글이어야한다. 일기가 쓰기 힘든 것이 소재가 없어서는 아니지 않는가?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 일기로 남길거리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되묻겠다. 정말 어제와 오늘이 똑같은가?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버스를 타고 똑같은 일을 하는 것 같겠지만,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달라졌고 인사가 바뀌었다. 어제 마무리 못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어제와 완벽히 똑같은 오늘은 없다. 그러니 소재를 찾지 못하는 건 관심의 부족이지 정말 똑같아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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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가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일까?
임정섭의 <글쓰기 훈련소>는 글쓰기 교육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 한다. 글을 많이 써보지 않아서 글을 쓸 기회가 없어서 글 쓰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라는 이론이다.
일리가 있는 생각인 듯 하다. 나의 경우(80년대 생이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능시험만 봤다. 지원한 대학은 논술 전형이 없어 준비하지 않았다. 글을 쓸 필요도 글을 쓸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20년간 주입식 교육만 받고 자랐다.
대학을 들어가니 서술형 시험을 본다. 당황스러웠다. 백지 하나를 내어주고 문제가 한 줄이다. '어쩌고 저쩌고 하니 그것에 대해 기술하라.' 글을 쓰는 걸 평생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대학생들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외우긴 했는데 대체 이건 어떻게 써야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첫 학기 서술형 시험의 점수는 간신히 낙제를 면하는 정도가 된다. 결국 같은 과목을 4학년에 다시 듣는다. 같은 시험을 다시 본다. 4년동안 서술형 기술에 익숙해지면서 점수도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물론 이건 일부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처음 글을 썼을 때
나는 일기를 쓰는 것이 싫었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무언가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유행하던 싸이월드도 빈 집으로 뒀다. 누구처럼 감수성 터지는 대문글도 작성할 줄 몰랐고, 모르는 사람도 나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에 거부감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블로그를 시작했다. 사진을 찍었고 글을 남겼다. 솔직히 그 때는 봐 줬으면 하는 대상이 있었다. 그 사람만 빼고 모두가 글을 읽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썼다. 원하는 대상이 아니지만 지인들은 글을 읽고 위로와 응원의 댓글을 남겨줬다. 그게 또 힘이 되는 경험이 하고보니 계속해서 공개적인 공간에 내 이야기를 써보게 되었던 것 같다. 내 마음만 들여다보고 내 감정만 쏟아내기 바쁜 시절이었다. 독자를 고민할 이유나 여유는 없었다.
마흔이 넘어 글을 쓰면서
이제와 새삼 옛 시절을 떠올린 이유는 지금의 글도 그 시절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나는 여전히 내 이야기를 쓰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과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제한된 소수의 사람을 만나고 추억을 꼽씹으며 그 땐 그랬지 하는 글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생각의 시작이 책이라는 것. 처음에는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미안했다.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들에게 이런 개인적인 글을 읽게 하는 것이 소중한 시간을 뺏는 것만 같았다. 왠지 정보를 담고 미처 찾아내지 못한 사실들을 덧붙이며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찾기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이 자리를 간절히 바란 누군가의 기회를 앗아버린 자의 태도로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고민의 시간은 꽤나 길었다.
내게 있어 글쓰기란
별 것 아닌 이야기가 아니라 소중한 이야기라고 말해주는 이들이 생겼다. 내게는 일상이지만 이러한 일상을 살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간접 경험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육아를 앞둔 예비엄마들은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같이 육아중인 엄마와 아빠는 공감함과 동시에 생각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꼭 남달라야만 특별한 것이 아니였다. 이것만으로도 글을 쓸 동기가 충분해 졌다.
input 없이는 output도 없다. 지난 한 달. 매일 글쓰기를 하면서 내공이 부족했음을 절실히 느꼈다. 시쳇말로 밑천이 드러난 것이다. '아! 내 실력이 이 정도구나!' 큰 깨달음이었다.
어떤 종류의 책을 읽어야한다는 건 없다. 장르도 난이도도 다양하게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생각의 폭이 커진다. 꼭 지식을 얻어야만 좋은 책이 아니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거기에 글을 쓰는 행위가 더해지면 책은 글쓰기의 자양분도 되어준다. 앞서 고민했던 소재의 고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생각을 잘 풀어내기만 해도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책을 읽으면서도 왜 읽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글을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 읽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어른다운 글쓰기를 위해
처음 쓴 서평을 보면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가 거의 모든 문장에 들어간다. 몇 번씩 서평을 쓰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점점 더 내가 쓴 글을 읽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등의 접속어가 거슬렸다.
<대통령의 글쓰기>는 접속어가 꼭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글을 읽는 사람 대부분은 성인이고 문맥상의 의미를 알고 있으니 굳이 접속어를 쓰지 않아도 의미는 충분히 전달된다고 했다. 책을 읽고 의식적으로 접속어를 생략해 봤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듯 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이제는 다양한 접속어를 사용하는 것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포기하지 않고 매일 글을 쓰다보니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글을 많이 찾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모방하고 있기도 한다. 조금씩 의식적 노력들이 더해지면서 눈에 띄게 글이 매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나의 글은 많이 부족하다. 부족한 점 만으로도 글을 한 편 쓸 수 있지만 여기서는 발전된 모습만 이야기 하자. 허물은 적당히 눈감고 잘하는 것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 변화를 맛볼 수 있다. 어른이 되니 좋은 점이 이런 것이다. 매사에 조금식 여유가 생긴다는 것. 오늘은 나이를 먹어서 생긴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글을 쓴다.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