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믿는 생산자
레이블 위에 'A'라고 거침없이 적혀있는 필체가 인상적인 와인. 바로 알렉산드르 방의 와인입니다.
파리에서 2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그의 양조장.
양조장 대문에서부터 알렉산드르 방의 양조장임을 알 수 있는 그의 시그니처 알파벳 A와 B가 보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2년간 보지 못했기에, 오랜만의 만남에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 감돌았습니다.
지난 2021년은 프랑스의 많은 지역이 냉해 피해를 입었습니다. 조심스레 그에게도 작황이 괜찮은지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와인 테이스팅을 곁들이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2021년 냉해 피해와 관련해서 상황이 어땠나요?
냉해는 피했어요. 하지만 수확 자체가 좋지 않고 워낙 소량으로 나와서 2021년 빈티지는 출시하지 않고 *우이야주용으로만 사용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우이야주(Ouillage)
와인이 오크통 안에서 증발하거나 오크통에 흡수되어 절대적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오크통에 와인을 꽉 채워주는 방식. 이를 통해 변질의 우려를 막는다.
처음 보는 와인이네요?!
'Contre Coeur'라는 새로운 뀌베에요. 제 아내 까홀리나가 만들었답니다.
'Against heart'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포도 줄기에서 옆으로 새어 나온 다른 줄기를 의미하기도 해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경작한 밭을 아내에게 줬는데, 2020년을 첫 빈티지로 출시하게 됐어요. 아내가 예술적 감각이 좋아서인지 이 와인에서도 제 와인보다 더 섬세한 뉘앙스가 드러나요. 와인을 만드는 사람의 영혼이 뀌베에 반영된다고 생각해요.
아내의 와인을 맛본 후 본격적으로 알렉산드르 방의 와인을 테이스팅했습니다.
왼쪽부터 엘 당쥬 19(L. d'Ange), 마드모아젤 M 19(Mademoiselle M), 라 르베 18(La Levee).
모두 소비뇽 블랑으로만 만들었습니다.
셋째 딸 '루스(Luce)'의 L과 천사를 뜻하는 Ange를 조합하여 만든 이름 엘 당쥬. 알렉산드르 방은 말합니다.
"엘 당쥬는 마치 가까이서 보면 헝클어진 꽃처럼 보여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꽃다발 같은 느낌을 주는 뀌베예요."
마드모아젤 M은 그의 첫째 딸 '마들렌(Madeleine)'의 M을 따왔다. 다른 뀌베들보다 가장 풍부하게 피어오르는 복합미가 매력적이죠.
라 르베는 알렉산드르 방의 엔트리급 와인으로 19 빈티지가 먼저 세상에 나왔고 18 빈티지는 올해 2022년에 출시하게 되었습니다. 18 빈티지보다 캐릭터가 돋보이는 19 빈티지를 먼저 출시하고 18 빈티지는 숙성을 통해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이죠.
엘 당쥬(L d’Ange)도 라 르베와 마찬가지로 19 빈티지를 먼저 출시하고, 18 빈티지는 더 시간을 두기로 결정했었죠? 와인을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자식을 여럿 키우다 보면 한 명은 조금 뒤처져 보이지만, 옆에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뭘 잘할 수 있는지 그 아이만의 장점을 발견하게 돼요. 엘 당쥬 18은 확실히 더 시간이 필요한 아이처럼 보였어요. 물론 제 선택이 늘 옳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시기를 묵묵히 지켜보며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죠. 반면 엘 당쥬 19는 스스로 복합적이고 섬세한 표현력이 있다는 특징이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19 빈티지를 먼저 내보내고, 18 빈티지는 4년을 그대로 지켜본 셈이죠. 48개월의 숙성 기간을 꽉 채운 후 세상으로 내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형형색색의 스틸 탱크들이 돋보이는 다른 숙성실로 저희를 데려갔습니다. 청량한 과실미가 돋보이는 '피에르 프레시외즈(Pierre Precieuse)'가 숙성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참고로 피에르 프레시외즈는 알렉산드르의 둘째 아들 '피에르'와 '귀한, 소중한, 보석'을 의미하는 Precieuse(Precious)를 조합하여 지은 이름이랍니다.
그는 노란색 탱크와 초록색 탱크에서 나온 두 가지 버전의 와인을 저희에게 건넸습니다. 각자 어떤 와인이 취향에 맞는지 손을 들어보니 의견이 나뉩니다.
이 두 가지 와인은 무엇인가요?
산화된 버전의 와인과 따이으(Tailles, 프레스 해서 나온 포도즙 중 나중에 나온 주스)에요. 산화시킨다는 건 와인에게 백신을 맞히는 효과인데, 따이으만으로 내추럴을 만든다는 것은 포도 자체가 정말 건강하고 천연 효모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해요. 이 두 가지 버전을 블렌딩해서 19 빈티지의 피에르 프레시외즈를 출시할 예정이에요.
이산화황을 넣지 않은 내추럴 와인의 힘은 무엇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며 믿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는 그는 출시할 예정에는 없지만 10년을 숙성한 마드모아젤 M 2012가 있는 뀌베 앞으로 향했습니다. 테이스팅을 한 후 세월이 무색할 만큼 와인에서 올라오는 생명력에 그저 감탄이 나왔습니다.
소비뇽 블랑 맞나요? 마치 뱅 존 같기도 하고, 와인의 표현력이 상당하네요?
이 뀌베는 처음에 너무 맛이 없던 터라 ‘망했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그러다가 ‘우이에(산화 숙성을 하지 않는)’를 하지 말고 그냥 두자는 판단을 했죠. 말 그대로 10년이 지나 이제야 조심스레 맛을 보게 됐어요. 이렇게 맛있어지다니,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드네요.
알렉산드르 방을 떠올리면 '플랜 B'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보통 레이블에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알파벳 A가 그려진 와인은 알렉산드르가 직접 농사부터 양조의 모든 과정을 맡고 있음을 뜻하며, 알파벳 B가 있는 와인은 포도를 사서 양조하는 네고시앙 와인들입니다. 특히 'B'가 새겨진 와인들은 본인의 농사가 잘 안 된 경우, 플랜 B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네고시앙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였죠.
어떤 과정을 거쳐 포도를 가져오고 있나요?
새벽 3시에 푸이 퓌메에서 떠나 보졸레로 향해요. 보졸레의 포도 농부와 함께 수확을 하고, 이 과정이 끝나자마자 양조장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밤 11시가 되어 있어요. 그럼 그때부터 밤새 와인을 만드는 거죠.
밤새 와인을 만든다고요?
와인을 만드는 시간이 지체될수록 포도의 발효가 진행되어서 식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피곤하더라도 하루를 꼬박 새우고 해야만 해요.
쌓여있는 오크통 앞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파벳에 시선이 갑니다. 오크통에 직접 알파벳 틀을 갖다 대고 그리다 보니, 위치도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유독 삐딱하게 새겨진 글자는 아마도 취한 날 작업한 것 같다는 그의 우스갯소리와 함께 어느새 다음 만남을 기약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매해 새로운 방법으로 끊임없이 와인 메이킹에 도전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방.
그는 앞으로 어떤 와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푸이 퓌메 지역에서 활동하는 알렉상드르 방(Alexandre Bain)은 프랑스 내 내추럴 와인 스타 생산 자에서 이제는 전세계 스타 생산자로 발돋움한 와인메이커입니다.
알렉상드르 방은 와인메이커 집안이 아닌 부르고뉴 내 보통의 엄격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18살이 되던 해, 포도나무 재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젊은 패기를 바탕으로 본(Beaune) 지역의 양조 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내추럴 와인에 눈을 떴습니다. 이후 2007년 빈티지부터 5ha의 땅에서 와인을 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 방의 와인은 소비뇽 블랑이 잘 익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또는 완전히 과숙한 후 수확하여 포도가 가진 최대의 숙성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스턴트적인 포도 재배와 관습적인 화학 성분의 사용에서 벗어나기를 주장하는 알렉상드르 방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내추럴 와인메이커로서 명성을 쌓고 있으며 다경 와인의 초창기부터 함께 해온 생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