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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해 Jun 23. 2024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

어릴 적 부터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내가 하는 생각을 모두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 전에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지인들을 모아 글모임을 만들었다. 글쓰기를 개선하려는 목적보다는, 꾸준히 글을 쓰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렇게 글을 4년 정도 쓰고 나니, 한계가 느껴졌다. 나의 일상이나 단상에서 벗어나, 조금 더 의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싶었다. 내가 어떤 주제를 쓸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과학이 떠올랐다.


꾸준히 쓰기만 해서는 글쓰기 실력이 늘어나는데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글쓰기 수업도 들었다. 칼럼을 쓰는 글쓰기 수업도 들어보았지만, 아무래도 과학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과학을 이야기하려면 좀 더 편안한 글이 좋을듯 했다. 그러다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에세이였다. 보통 에세이는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풀어내는 글이기 때문에, 지식을 전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안그래도 사람들이 과학을 어렵게 느끼는데, 글이 말랑말랑하기라도 해야할 듯 했다.


마음은 말랑말랑한 글을 쓰고 싶었지만, 이미 딱딱하게 굳어진 습관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다. 몇 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한 작가의 에세이 쓰기 수업에서 과학관 탐방기를 과제글로 제출했다. 에세이보다는 탐사 보고서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에세이를 읽고 나면 작가의 감정에 풍덩 담궈져야 한다고 했다. 작가의 정서가 호수를 이루고, 과학은 호수에 떠 있는 돛단배 정도라고 했다. 감정을 글에 담으라니,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괜찮아, 과학이야


과학을 소재로 내가 써온 글쓰기에는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학교에서 실험을 하면 실험보고서를 썼다. 실험보고서는 이론적 배경에서 시작하여,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지 실험의 목적과 방법론, 결과값과 과학적인 분석과 해석, 결론 등으로 채워졌다. 대학원에서는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는 법을 익혔지만, 실험보고서이든 논문이든 어딜봐도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하면 에세이를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쓴 에세이를 참고해보기로 했다. 에세이로 과학을 말랑하게 전달해보려는 시도를 한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 임소정 작가가 쓴 <괜찮아, 과학이야>는 과학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에세이집이다. 제목을 처음 봤을 때에는 ‘괜찮아’라는 단어가 어떻게 ‘과학’과 함께 붙어있는지 의아했다. 과학이 어떤 류의 위안을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의문은 책을 읽으면서 말끔히 해소되었다.


저자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과학적인 지식 사이에 연결점을 기막히게 찾아내곤 했다. 언뜻 보기에 이어지지 않은 것 같았던 이야기가 저자의 글 속에서는 구슬 목걸이처럼 하나의 실에 꿰어졌다. 그렇게 엮어낸 구슬의 시작과 끝은 맞닿아있었다. 글에서 소개된 일화는 과학의 렌즈로 보면 위아래가 뒤바뀌어보였다. 저자는 과학을 전달해야할 무언가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렌즈로 사용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상황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을 한다. 어떻게 좋고 나쁘고, 어떤게 옳고 그른지 말이다. 우리가 또는 다른 이들이 내리는 판단이 언제나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저자는 그러한 불합리를 과학으로 뒤집어보인다.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과학의 렌즈를 통해 저자는, 세상을 뒤집어서 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한다. 책의 제목 대로, ‘괜찮아, 과학이야’라며 저자는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내가 건네고 싶은 이야기


에세이를 읽고 나면 저자의 감정에 풍덩 담궈져야 한다는 글쓰기 선생님의 말이 너무나도 이해되는 에세이집이었다. 저자가 궁금해졌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받았던 무수한 지적들을 반영하면, <괜찮아, 과학이야>같은 에세이가 나올 것만 같았다. 마치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의 해설을 찾아본 기분이랄까.


해설을 보았다고 해서 바로 문제를 풀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 나름대로 고민해보고, 원리를 깨우쳐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과학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건네고 싶을까? 아니,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작가로서 나의 정체성과 말을 건네는 대상 등을 고민해보아야겠다. 고민으로 시작해서 또 다른 고민으로 글을 마무리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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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노다해(https://linktr.ee/dahae.roh)


대학원에서 통계물리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과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단법인이다. 주로 회계/세무를 담당하지만, 사무국 규모가 작아 거의 모든 일에 손을 대고 있다. 부캐로는 과학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한다. 과학 강연, 과학 글쓰기, 과학책 번역을 하고, 과학 타로도 만든다. 과학과 과학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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