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부디 안전하게 비행을 마치길
2019년 8월 10일 11시 51분.
상해는 지금 매섭다 못해 무서운 바람이 불고 있다. 9호 태풍 레끼마다. 딜레이에, 결항에. 회항에, 비상착륙까지. 시시각각으로 전해오는 상황 공지에 핸드폰 진동이 무섭게 울려댄다.
상해는 어제 오후 2시경 태풍의 사정권에 들었다.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무사히 랜딩을 하던 새벽녘까지만 해도 ‘에이, 설마…’하는 마음이 있었다. 청명한 새벽의 하늘은 마냥 잠잠하기만 했다.
덜컹 덜커덩
낯선 소음에 잠에서 깼다. 암막 커튼을 걷었다. 나무들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무자비한 강풍에 실린 빗방울들이 파박 하는 소음을 남기며 창문에 흩뿌려졌다. 오후께로 넘어오자 점점 거세지던 바람이 걷잡을 수 없는 돌풍이 되어 창문을 마구 흔들어대기에 이른 것이었다. 입사 후 처음 겪어보는, 정말 최악의 날씨 상황이었다.
저녁을 포장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가 동기를 마주쳤다. 비행을 막 끝내고 돌아왔다고 한다. 일찍부터 일어나 단정하게 고정했을 머리가 대찬 바람을 만나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의 오늘이 어땠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 비행 괜찮았어? 머리만 봐도 고생한 줄 알겠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말도 마, 나 진짜 입사 후에 이렇게 무서웠던 거 처음이야. 롤러코스트 타는 줄 알았어. 오늘 못 돌아올 뻔했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세 시간 딜레이 되고 겨우 떠서 돌아오는데 터뷸런스가 장난 아니더라고, 푸동(원 목적지)에 내려야 하는데 도저히 착륙이 불가능한 거야. 홍교(상해의 타공항)에라도 임시착륙하려고 하는데 또 실패해서 남경 녹구공항으로 가려고 돌렸다가 기장님이 마지막으로 푸동공항 한 번 더 시도해보자고 해서 몇 번 시도 끝에 겨우 착륙했어. 진짜 무섭더라.
-와, 진짜... 장난 아니다. 승객들은 딜레이 때문에 뭐라고 안 하셨고?
-처음엔 불만 있었지. 한국은 날씨 맑았으니까 항편이 왜 이렇게 딜레이가 되나 이해 못하셨는데 상해 내려서 상황이 지금 어떤지 직접 보시고는 안전하게 내려주셔서 감사하다 하시더라. 돌아오게라도 해줘서 고맙다고,
-진짜 그럴만하다, 목숨 걸고 돌아왔네, 진짜 고생했어..
하지만 운 좋게 착륙을 했던 건 그 동기가 마지막이었다.
서울, 제주, 일본, 대만 등 각지로 떠났던 비행기들은 결항을 면치 못했다. 프라하행 비행기는 무한정 딜레이가 되었고 치앙마이에서 돌아오던 비행기는 우한(중국 국내)으로 비상착륙을 하였다. 미국, 유럽발 승무원들은 비행기 탑승은커녕 기약도 없이 현지에 발목이 묶이고 말았다. 항편 취소 공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져 왔으며 간혹 비행 중인 동기들이 식사 카트가 쓰러졌다느니 갤리에서 넘어졌다느니 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왔다. 정말이지 어마 무시한 대자연의 위력이었다.
입사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날씨란 ‘호사품’ 내지 ‘기호품’에 가까웠다. 날씨가 맑은 날에 유난히 기분이 더 좋은 사실이지만 맑지 않다고 한들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니까.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운치가 있어 좋았고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또 다른 감상을 얻곤 했다.
하지만 입사 후 내게 날씨란 ‘필수품’, 그 이상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당장 비행을 앞두고 악천후를 맞닥뜨린다는 것은 마치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기에. 어떤 비상상황이 발생할지, 안전하게 비행을 마칠 수는 있는지, 그 어떤 것도 쉬이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했다. 그 두려움만큼 내 하루에 ‘날씨’가 미치는 파급력 또한 나날이 커져만 갔다. 소위 ‘날알못’이던 내가 세계 날씨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지금의 나는 세찬 바람이 두렵고 내리는 눈이 무섭다. 무시무시한 대자연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운명을 가진 그대들의 하루가 녹록치 않으리란 것을 알기에.
여전히 바람은 사그라들 생각이 없는 듯하다. 핸드폰에는 내일 취소될 항편이 벌써부터 줄줄이 공지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비행을 준비하고 있을 그대들이 걱정되는 하루의 중턱이다. 부디 안전하게만 돌아오길. 그대들의 안전 비행을 멀리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