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상의 맥시멀 리스트 선언
미니멀리즘의 사전적 정의는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이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의 영역을 뛰어넘어 그 실용성, 효율성을 인정받으며 순식간에 사람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나는 지난해 미니멀리즘 열풍을 몸소 느꼈는데 비행 후 방을 함께 썼던 동기 열 명 중 세네 명이 "나, 미니멀리즘에 동참해보려고."라며 미니멀리스트 선언을 했기 때문.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미니멀리즘 소식에 귀가 팔랑팔랑 하여 한 달여간 동안 '나도 이 참에 줄여봐?'하고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삶을 살짝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생의 보따리장수가 어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겠는가. 빼자니 필요할 것 같고, 두고 가자니 아쉬울 것 같고. 미니멀리즘의 바다에 발가락 정도 담가보았을까, 되지도 않을 일에 애쓰지 말자며 빠르게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물건에 욕심이 많으냐? 아니, 사실 그렇지도 않다. 있다 없어지면 속은 좀 끓을 수 있겠으나 기호품 정도야 없으면 없는 대로 무던하게 또 무(无)에 적응해가겠지. 그렇다면 왜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느냐? 그 이유의 팔 할은 아무래도 고쳐지지 않는 오지랖 때문이랄까. 보따리장수가 보따리를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는, 내 경우를 본다면 고쳐지지 않는 습관 때문이다.
가령 체류지에서 예쁜 물건을 발견했다고 치자. 아니, 이 예쁜 걸 어떻게 내 것만 홀랑 집어올 수 있겠는가. 가족들 수대로 하나씩 집어 든다. 음, 그냥 가려니 뭔가 좀 아쉽다. 공부하느라, 회사 다니느라 고생하고 있을 친구들 것을 하나씩 고른다. 그러고 보니 이모들이 지난 엄마 생신 때 얼마나 신경을 써주셨던가. 감사하니까 또 하나씩, 이모들 것만 사면 고모들한테 면목이 없지, 고모들 것도 하나씩. 그럼 삼촌들이 서운하려나? 삼촌들한테는 뭘 사줄지 돌아다녀봐야지.
오지랖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보따리장수의 가방은 어느샌가 주체할 수 없는 크기로 둔갑해있다. 별 수 없다. 이 오지랖은 가족력이라 고쳐지지도 않는다. 이 영광은 지금 한창 귀가 간지러우실 우리 한 여사님에게 돌리는 수밖에.
내친김에 낯 간지러운 당위성을 조금 더 더해보자.
한 번은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선녀님께서 내 사주를 쭉- 훑어보시더니 내게 툭 한 마디를 던지셨다.
너는 주변에 꽃거지가 많은 사주야.
거지는 거지인데 꽃거지가 많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안 좋은 사주인가 싶어 꽃거지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선녀님 왈.
"꽃거지가 뭐긴 뭐야, 네가 자꾸 챙기게 되는 사람이지. 거지는 너한테 달라고 요구를 하고 뺏어가겠지만 꽃거지는 좀 달라. 가만히 있어도 네가 보따리 내놓게 되는 거지. 너는 인생에 꽃거지가 많아. 자꾸 챙기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거야."
허허허,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나 친절하게 확인시켜주시다니. 사주야 확률의 결과값이라고들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꽃거지를 품고 가는 사주를 가졌다는 것 아닌가. 고치기 힘든 가족력에 내 운명까지 그렇단다. 이쯤 되면 (내 인생에 치명적일 것은 없으니) 인정하자. 나는 애당초 보따리상 운명인 거다. 천 년 만 년 비행기 탈 것도 아니고 해 줄 수 있을 때 해주는 게 뭐가 나빠. 에라 모르겠다. 다들 미니멀리즘이 대세라고 해도 나는 꿋꿋이 맥시멀 리스트로 살아가기로 한다.
오늘도 짐이 무겁다. 양 손 가득 오지랖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좀 과한가 싶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 글로 나의 맥시멀리즘에 당위성을 부여해두었으니 마음만은 가벼운 걸로 하자.
"어휴, 보따리장수 인생, 언제 끝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