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며 괜스레 벅차오르는 마음에 눈물을 찔끔이던 그 시절 코흘리개 꼬마는 어느덧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1인분의 사람 몫을 낭낭히 해내는 성인이 될 즈음엔 아마 감상이 좀 달라지겠거니 했건만, 겨우 노래 두 마디에 콧잔등이 시큰해오는 걸 보니 이 노래에는 아무래도 눈물 버튼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실, 이는 내 인생에 수많은 은사님이 존재했음의 반증이기도 하다.
나는 감사하게도, 늘 시기적절한 때에 좋은 스승님들과 연이 닿았다. 성적과는 무관하게 내게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시고 응원해주시던 수많은 은사님은 나를 '오늘의 나'로 이끌어주신 명실상부, 숨은 히어로이다.
그리고 지난 5월 15일, 또 한 번의 스승의 날을 맞았다. 코로나 19의 재확산으로 또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는 마당에 은사님들을 직접 찾아뵈러 가진 못할지언정 제대로 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하자 리스트를 '스승에 날에 감사했던 선생님 찾아뵙기'에서 '스승의 날에 감사했던 선생님께 전화드리기'로 고쳐 적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첫 번 째 은사님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해당 선생님은 일반 사회를 가르치는 교과목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당시 유난히도 선생님의 사회 수업을 좋아했다. 은근한 유머와 진심 어린 잔소리가 더해진 선생님의 흡입력 있는 수업은 나에게 전례 없는 예습 습관까지 만들어 주었다. 쉬는 시간이면 끈덕지게 찾아와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대는 왈가닥 여고생이 살짝 귀찮을 법도 하건만 선생님께서는 찰나의 싫은 내색도 없이 늘 한결같이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잔잔한 인연은 졸업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선생님은 과일 음료 한 박스를 수줍게 손에 쥐곤, 갖은 이유를 대가며 끈덕지게 찾아오는 제자를 몹시도 예뻐해 주셨다.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벌써 2년쯤 흘렀던가, 전화는 처음인지라 약간의 긴장이 몰려왔다. 조심스레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잠깐의 통화음 끝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하자야! 잘 지내지?"
"네, 선생님! 저는 너무 잘 지내죠!"
스승의 날을 축하드린다는 말과 함께 선생님의 안부를 여쭸다. 코로나 19로 인해 학사 행정이 차일피일 밀리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는터라 걱정이 앞섰다. 선생님께서는 말도 말라며, 코로나 19의 여파로 이미 인터넷 강의를 촬영하고 진행 중이라 말씀하셨다. 매일같이 336명의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려가며 출결 체크를 하고 과제 제출을 채근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리셨다고. 흥미로웠던 건 그 와중에도 동아리 멤버를 모집하고 반장, 부반장 선거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선생님 반장 부반장을 뽑는 게 인터넷으로 진행이 가능해요?"
"응, 출마하고 싶은 애들이 자기 유세 내용 정리해서 올리고 나머지 학생들이 그 내용을 읽어 보고 투표하는 거지. 사실 1학년들은 입학해서 여태껏 서로 만나본 적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모든 게 진행이 되는 게 좀 안타깝긴 하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 과학의 날이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앉아 ‘1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던 게 떠올랐다. 우리가 지금 그 그림의 언저리쯤 와 있구나.
선생님과 그 외의 소식과 서로의 일상, 계획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전화를 끝맺었다. 얼른 코로나가 종식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두 번째 은사님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수학 과목 선생님이셨는데 뼛속까지 문과 체질이었던 나는 고교 시절을 끝으로 결국 수학과 담을 쌓고 말았지만 그 시절만큼은 열과 성을 다해 수학 공부를 했더랬다. 사람이 좋으면 그 과목까지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그녀의 쿨하고 호쾌한 모습이 좋았고 당시 거침없이 수학 공식을 풀어내는 선생님의 뒷모습이 어찌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그 시원시원한 성격과는 달리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작은 고민도 허투루 듣지 않으셨고 특유의 결단력과 유머로 학급을 원만하게 이끌어주셨다. 오랜 추억을 되내이며 약간의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하자예요!"
"오, 하자구나! 오랜만이다, 하자!"
선생님은 변치 않은 호쾌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나 또한 따라 웃으며 스승의 은혜에 감사를 전했다. 사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찾아뵌 게 그리 오래지 않다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은 내가 승무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으며 더 놀랍게도 이미 은퇴를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렇게나 오래 연락을 드리지 않았었구나 싶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은 특유의 사투리 억양으로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보지, 나도 그렇게나 오래된 지 몰랐네." 하며 죄송한 제자의 마음을 쿨하게 일축했다. 역시 우리 선생님.
같은 반이었던 학급 친구들의 소식을 말씀드리자 선생님께서는 오랜만에 듣는 제자들의 이야기에 굉장히 즐거워하셨다.
"다음에 애들이랑 같이 한 번 찾아뵐게요."
"아니, 일부러 나 때문에 만나지는 말고, 너희가 만나기로 했을 때 한 번 기회가 되거든 부담 없이 들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끝까지 제자들을 먼저 배려해주시는 선생님의 마음에 감사를 느끼며 전화를 끝맺었다. 마음속에 찌르르, 하고 행복한 전율이 일었다. 어느새 긴장은 사라지고 세 번째 전화가 기다려졌다.
세 번째 은사님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외모 때문에 별명 부자로 유명했던 과학 선생님은 나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사해준 분이기도 하다. 중학교 시절, 나는 누가 봐도 과학에 1도 소질(+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써클 활동으로 과학탐사반을 추천해주셨다. 선생님께서 직접 운영하시는 써클이라 그런 건가 싶었다. 사실 구미가 당기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나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선생님의 진의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별다른 기대 없이 시작한 활동이었지만 그 당시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보낸 시간들은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자리매김해있다. 다 함께 별자리를 관측하고 온갖 과학 실험을 시도하고(tmi지만 불도 한 번 났었다) 학교 건물 뒤 작은 늪지를 조성해 함께 생물체를 키우고 간간히 다른 지역으로(가령, 고성 공룡발자국 탐사) 과학탐사여행을 떠나던 그 모든 순간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행복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선생님께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하자예요! 쌤 제 번호도 등록 안 해두셨던 거예요? 저 섭섭해요."
"오오 그래, 하자구나! 아니야, 네가 번호를 바꾼 건 아니니? 분명히 제대로 저장을 해뒀는데."
당황하시는 선생님의 음성에 짓궂은 제자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스승의 날의 감사를 전했다. 선생님께서는 잊지 않고 전화해주어 고맙다며 함께 웃으셨다. 듣자 하니 선생님께서는 연천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 중이시고 동영상 강의를 찍진 않지만 매일 학생들의 과제와 질문에 답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고.
"어휴, 수업이고 과제고 다 인터넷으로 진행되고 있다니 저로서는 실감이 안 나요."
"선생님도 처음에는 그랬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이지, 뭐. 나같이 나이 많은 선생님들만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느냐고 혼쭐난 거야, 하하하"
선생님께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말씀하셨지만 그럴 리가 있을까, 나의 은사님들은 수십 년간 판서 수업을 이어오시던 분들이었다. 갑작스레 몰아치는 변화에 당황스러운 하루하루가 퍼레이드처럼 이어졌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코로나가 야속했다.
"선생님, 코로나만 좀 잠잠해지고나면 과학반 애들이랑 한 번 찾아뵐게요. 애들도 이제 다 취업하고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그러자, 얼굴 본지도 벌써 오래 전이네. 언제든 찾아와라."
선생님의 따뜻한 끝인사와 함께 전화를 마쳤다. 조만간 과학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생각했다.
네 번째 은사님은 대학교 교수님이었다.
교수님께서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학생 참여형 강의를 진행하시는 분이었다. 수동적, 일방향적, 단순 암기식 수업에 무료함을 넘어 환멸을 느끼던 나에게 교수님의 강의는 지독한 가뭄 끝 단비와 같았다. 교수님은 발표나 연극, 달란트제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수업을 진행하셨고 덕분에 교수님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서 늘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긴 했지만 나에게만큼은 '극호'였다. 뿐만 아니라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의 고민이나 장래에 특히 관심이 많으셨는데, 학업 진로 시간을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보내버리는 다른 교수님들과는 달리 학생 한 명 한 명과 진로상담 약속을 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다. 나는 그런 교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교수님께서도 늘 나에게 많은 것을 나눠주려 하셨다.
추억에 젖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을 거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이게 누구야, 하자구나. 잘 지내고 있니? 안 그래도 니 소식이 궁금했는데"
교수님께서는 조심스럽게 나의 안부를 먼저 물으셨다. 나는 내 상황을 간략히 설명드린 후 스승의 날을 맞아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연락을 드리게 되었노라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시며 오늘이 스승의 날인지도 몰랐다고 답하셨다. 참여형 강의에서는 쓸 일 없던 ppt 자료를 학생 없는 빈 교수실에서 매일같이 만들고 있자니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헷갈릴만하셨을 터. 코로나가 일상의 참 많은 부분을 바꿔놓는다는 제자의 한숨 섞인 한 마디에 교수님은 어쩔 수 없지, 하고 단념한 듯 대답하셨다.
"그래도 매 스승의 날에 교수님 교수실은 항상 북적거렸는데 그래도 코로나 덕분에 오랜만에 한산하게 보내시겠네요!"
분위기를 좀 전환해보려는 제자의 말장난에 교수님은 허허 웃으시며 코로나가 잠잠해지거든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코로나 발병 이후부터 모든 끝인사는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거든-'으로 시작하는구나,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주인공인 다섯 번째 은사님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나의 오랜 은사님은 항상 나를 친딸처럼 대해주셨다. "큰 딸! 이제 등교하니?" 하며 무거운 책가방을 슬쩍 들어주시던 선생님, 과학탐구의 날에 내게 최고로 높이 나는 연을 만들어주시곤 방방 뛰며 신나하는 날 보며 웃어주시던 선생님, 백일장 대회에 나를 추천해주시곤 글짓기 상을 받아오자 환호하며 머리를 헝클어놓으시던 선생님, (내 마음은 어찌 아셨는지) 남몰래 좋아하던 친구 옆에 두 번 씩이나 자리를 배정해주시던 선생님-. 선생님은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 주셨다.
심지어 스승의 날은 선생님의 생신이기도 했다. '역시 나실 때부터 참스승이셨어.'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르르-
기나긴 신호음 끝에 통화불가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교감선생님이 되신 터라 더더욱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계시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저녁 늦은 시간 즈음,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며 큰 딸의 축하에 기쁘다는 선생님의 답문이 도착했다. 여전히 내가 선생님의 큰 딸으로 기억되고 있음에 행복한 하루의 끝을 보냈다.
이렇게 나는 스승의 날을 맞아 인생의 은사님들께 연락을 드렸다.
너무나도 감사했던 것은, 선생님들께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선생님, 저 하자예요."라고 이야기했을 때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봐 주셨다는 거였다. 다소 흔한 이름이기에 분명 인생에 수많은 '하자'들을 가르치셨을 법하건만, 은사님들은 단숨에 나를 알아봐 주셨다. 사랑하는 스승님들의 인생에 조금은, 인상 깊은 제자로 남아 있다는 것이 뿌듯하고 기뻤다.
오늘도 성공적으로 하자 리스트를 마쳤다. 감사한 밤이다.
내가 감히 누군가의 인생에 손을 뻗어 선한 영향력을 주고 그네들의 인생에 참된 스승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스승이란 두 단어로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히 생을 마칠 수 있을까.
훗날 은사님들께서 내게 그래주셨듯, 나 역시 인생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그네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뿌리깊은 어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 다시금 다짐해본다.
글을 마무리지으며 스승의 날에 걸맞은 마지막 명언을 빌려본다.
스승은 영원히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이 어디서 끝날 지는
스승 자신도 알 수 없다.
-헨리 브룩스 애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