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낯선 누군가의 집, 현관문 앞.
은근한 긴장이 몰려온다. 다시 생각해보니 퍽 우습다. 아니, 겨우 이게 뭐라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목을 한 번 큼- 풀고는 칠이 약간 벗겨진 초록 현관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지만 문 너머는 깜깜무소식. 혹시나 안 들렸나 싶어 다시금 현관문을 두어 번 더 두드려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문 옆에 자리한 초인종은 아무래도 제 할 일을 오래전에 잊은 듯 아무리 눌러봐도 나 몰라라, 무음 모드였다. 머쓱함에 괜스레 발을 굴렀다.
오늘은 나의 첫 당근 날이다.
나는 평소 중고 제품을 꺼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닥 선호하지도 않는,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다분히 일반적인 소비자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쿠X을 이용했고 쇼핑을 즐기진 않지만 계절 별로 유행하는 옷 한 두 벌쯤은 매년 꼭 쟁이는, 그런 보통의 소비자.
하루는 검색 엔진을 훑다 보니 <인간이 버린 마스크에 발 묶인 동물들>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사 속에는 인간의 이기에 피해 입은 동물들의 처절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환경오염과 관련해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그 뒤에 숨어 있던 더 미안한 진실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지구가 심각한 건강 이상을 앓고 있다는 목소리가 하루도 쉴 새 없이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고 심각하기로는 대기, 수질, 토양, 생태계 뭐 하나 빠지는 환경 분야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니었다. 올여름, 우리는 무려 7번의 태풍을 겪었다. 지구 반대편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는 한여름에 발목이 빠질 만큼 눈이 내렸다. 호주에서는 대형 산불이 연거푸 발생했고 추운 날씨로 익히 알려진 시베리아는 지금껏 전무했던 38도 폭염에 혹독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이상 기후니, 기후 위기니 하는 무시무시한 단어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로서는 듣고도 자각하지 못하고 겪고도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불과했다.
안타까울 겨를이 없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개인의 입장이기에 당장 거창하게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지만 한 가지, 바로 지금부터 실천 가능한 해결책은 늘 그랬듯 나 스스로에게 있었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익숙하게 들어왔던 고리타분한 말이 지금 당장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해답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게 내가 평소에 잘 지키지 못하는 부분에서부터 하나씩 짚어내며 < 환경보호 1년 > 목표를 세웠다.
- 패스트 패션에 편승하지 않는다. 필요시 당근 마켓을 이용하여 아나바다에 동참한다. (목표 기간 동안 새 옷을 사지 않을 것)
- 플라스틱 제로 캠페인에 참여한다. 마트에 갈 때 장바구니를 꼭! 챙기고 반찬 통을 챙겨가서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을 삼갈 수 있도록 한다.
- 택배 주문을 자제하고 분리수거 시 택배 전표, 테이프 등 이물질을 '제대로' 제거한 후 접어서 분리수거한다.
- 화장품 용기로 인한 오염을 방지하고 (내용물을 버리는 과정 중에 생기는)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메이크업 제품 다이어트를 한다.
- 음식을 낭비하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양만큼만 만들거나 주문하고 음식은 남기지 않는다.
- 사용한 마스크의 귀 걸이는 꼭 잘라서 버리도록 한다.
- 종이컵, 나무젓가락 등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한다.
- 텀블러 사용을 생활화한다. 테이크 아웃은 텀블러로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행 계획들을 적어봤다. 원래도 화장지는 적게 쓰고 물도 아껴 쓰는 편이라 생각해서 이미 잘 지키고 있는 것들은 생략하고 보완해야 할 점들을 위주로 계획을 세웠다. 10월부터 '지속 가능한 소비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겨우 일주일 남짓 지났을 뿐이지만 익히들 알고 있지 않는가,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되어가는 그 시간 속에서 어느샌가 자연스레 '환경 보호'가 일상이 된 나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벌컥, 문이 열렸다.
"아이고, 문을 좀 크게 두드리시지 그랬어요."
주인아저씨께서는 아무래도 식사 중이셨던 모양이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나눔 받기로 한 의자를 스윽, 내 쪽으로 밀어주셨다. 바퀴도 달려있고 튼튼하니 꽤나 쓸 만한 녀석이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감사의 표시로 가져온 바틀 커피를 아저씨께 건네드린 뒤 의기양양하게 의자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지속 가능한 소비자'로서의 성공적인 첫 당근 거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