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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걷는 여자 Oct 12. 2020

네가 사랑한 건 내 부캐였어

 오랜만에 반가운 연락이었다. 대학시절 함께 대외활동을 하며 알게 됐던 친한 오빠의 잘 지내냐는 연락에 반가운 안부를 나누기도 잠시, 오빠는 약간 쭈뼛이며 말을 이었다.



저, 내 친구가 승무원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데
 혹시 소개팅하실 분 있으실까?



으엥, 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튀어나가려는 것을 눌러 참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친구분께서 원하는 여성의 스타일이나 성격은 없냐고.


"뭐 친구가 딱히 별다르게 얘기한 건 없고 그냥, 성격 착하고 밝고, 블라블라블라."


 그 뒤로 조금 더 말이 오갔고 '동기들에게 한 번 물어보겠다'는 인사치레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쩝. 씁쓸함에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그 많은 동기들을 두고도 소개를 시켜주고픈 사람은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빠의 이야기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조합해봐도 전해 들은 그 말들은 '구체적인 이상형'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모든 이'를 향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 누구에게 물어봐도 하등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올 리 없으리란 게 불 보듯 뻔했다. 과연 그 어떤 동기가 "승무원을 만나보고 싶으신 분 이래"라는 말에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승무원이기 이전에 나는 나인데.    






 승무원으로서의 나는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항상 밝은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승객들을 케어한다. 승객들의 말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아마 대부분의 승무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 이리라. 하지만 그 모습은 어디까지나 '승무원이라는 부캐로 업무에 충실한 나'일뿐, 유니폼을 벗은 나는 기내에서 볼 수 있는 '그녀'가 아니다. 오죽하면 항공사에 합격하고 처음 동네 친구들을 만났을 때, 녀석들이 내게 "너 같은 왈가닥이 승무원이 되는 거였어?"라고 장난스레 이야기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무원을 만나는 공간은 비행기, 바로 그들의 일터이다. 회사가 추구하는 기조에 따라 친절한 부캐로 승객을 마주하는(달리 말해 할 수밖에 없는) 곳이란 말이다. 그 혹은 그녀가 이성으로 당신 앞에 섰을 때도 비행기 안 부캐의 모습 그대로 일지는 글쎄, 미지수이다. 물론, 그렇다고 승무원의 실제 모습과 기내에서의 모습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단편적으로 비친, 소위 말하는 '업무용 모습'을 모든 승무원의 실제 디폴트 값 이리라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뜻이다. 직장인이라면 으레 부캐 하나씩들 가지고 있지 않은가. 같은 직장인으로서 승무원도 마찬가지라고 좀 가볍게들 생각해주시라. 차곡차곡 쌓인 오해가 서로 다른 색으로 빛나는 개인을 '승무원'이라는 타이틀 아래 한 데 묶는 편견의 말뚝이 되는 법. 부디 직업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기 이전에 눈 앞의 사람, 그대로를 바라봐줬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다.


같은 꽃들도 이렇게 다 서로 다른걸


“친구분은 아무래도 다른 인연이 있으시려나 봐”


 며칠 뒤,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정중하게 소개팅 주선을 거절했다. 오빠는 허허, 사람 좋게 웃으며 괜찮다고 한다. 그래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이름 모를 그가 만나고 싶었던 건 아마 그녀들의 부캐였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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