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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걷는 여자 Nov 03. 2020

승무원이지만 예쁘진 않습니다

 최근 승무원 브이로그를 하나 봤다. 남자 친구와 술을 한 잔 걸쳐가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영상 속 그녀는 본인의 남자 친구를 향해 물었다.


"여자 친구가 승무원이라고 하면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어때요?"


곁에 앉아있던 남자 친구는 잠깐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들은 '오오오오~!' 뭐, 다들 이런 반응이죠."


 해당 영상 속 남자 친구분의 설명을 조금 더 빌리자면, 그의 대부분의 친구들은 '내 여자 친구가 승무원이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본인이 '비행기에서 마주했던 그녀'를 디폴트 값으로 생각하며 반응하는 듯하다고 이야기했다. 키 크고 예쁘고 잘 웃고 어떻고 저떻고... 아마 그러니까 인상에 깊게 남아있겠지?






 하지만 같은 종의 꽃이라도 모양새가 서로 다르듯, 승무원이라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십인십색이라고,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모두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승무원을 향한 프레임 한 가지가 사람들의 인식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승무원은 예쁘다'라는 생각이다.  


 한 번은 멀어진 지인 중 한 명이 내게 "솔직히 살면서 예쁘다는 소리 한 번이라도 들어본 여자들이 너도나도 도전해보는 게 승무원 아냐?"라고 물었다. 또 한 번은 돌아다니는 내내 마스크 한 번 벗은 적 없는 내 동생을 나로 착각한 동네 아주머니들이 "뭐 승무원이라더니 예쁘지도 않네"하며 수군대는 것을 마침 동생의 친구가 목격하곤 이야기를 전해준 적도 있다.(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투시능력이 생기는 분들도 더러 있나 보다) 그 외에도 더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승무원들이 하나같이 다 키가 크고 빚은 듯 예쁠까? 이참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자.

 

 일단 나는 키가 작다. 아무리 허리를 곧추 세워봐도 163cm이고 아주 컨디션이 좋은 날에야 겨우 164cm가 찍혀 나온다. 대부분의 항공사가 162cm라는 최소 신장을 요구하던 취업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봤을 때, 승무원으로 합격한 사람치곤 몹시 아담한 신장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동기들 사이에서도 나는 작은 축에 속한다. 그중 절친한 몇몇은 나를 꼬꼬마, 꼬맹이라 부른다. 그래, 소위들 말하는 키로 '문 닫고 들어간 사람'이 바로 나다.


 둘째, 나는 객관적인 미인상은 아니다. 물론 나는 자기애가 실로 충만한 편인지라 주관적으로는 나 스스로가 충분히 예쁘다 생각하고 마음에 들지만, 인정할 건 인정한다. 나는 그 누가 봐도 예쁜, 보편적인 미인상은 아니다. 웃을 때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고 살짝 각진 턱은 다부진 느낌을 준다. 광채 나는 피부? 오목조목 작은 얼굴?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승무원'이라고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두 가지 프레임만 두고 보아도 내게는 기본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승무원이 되었다. 심지어 두 개의 항공사를 동시에 합격했다구. 당당하게 항공사 합격증을 거머쥐던 그 당시의 내게 삶의 중심이자 자부심이 되었던 건 딱 하나, 바로 '나' 그 자체였다.

 살면서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자부심인 적이 없던 내게 있어 '승무원이면 당연히 예쁘지 않냐'는 식의 시선들은 알게 모르게 나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느샌가 슬금슬금 외모에 신경이 쓰였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좀 더 예뻐지기를 갈망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스스로가 '미운 오리 새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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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문득 '왜 내가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굳이 예뻐지려고 아등바등해야 할까.

 사실 근본적으로는 '예쁘다'는 말부터가 그랬다. '예쁘다'의 객관적인 기준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는가. 코가 몇 cm 이상이어야 하고 입술 두께는 어떠해야 한다고 적혀있는 미인 사전이라도 있느냔 말이다. 결국 누군가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생각의 기준은 지극히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자존감의 기준점을 어디에 찍느냐 또한 마찬가지였다.

 외적인 모습에 자존 기준점을 세우는 순간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외모'가 된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평가기준은 개인의 주관적 영역이기에 대상에 따라 시대에 따라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은 본인이 만족하지 않는 이상 더 큰 갈증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스스로가 자존 기준점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 생각, 내 말, 내 경험, 내 발자욱. 지금의 '나'에 이르기까지 쌓아온 그 모든 순간들이 나의 자신감이자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스스로를, 그리고 소신 있게 걸어온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외적인 것과 별개로 반짝반짝 빛난다, 아주 예쁘게.  


 타인의 프레임에 나를 끼워 맞추느라 나의 색을 잃는 악순환의 고리를 인지하고부터 나는 다시금 나 그대로를 바라보기로 했다. 내 안에서 자존(自尊)을 찾던 그때로 되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다. 사실 지금도 내가 어디쯤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의 내가 꽤나 마음에 드는 걸 보니 원점에서 아주 먼 곳은 아니리라.  


 




 비단 승무원으로서의 프레임뿐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프레임이 존재한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잘못 굳어진 생각의 프레임들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거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사고의 틀을 부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지나온 지금까지의 순간들이 그랬듯, 앞으로 남은 여정 속에서도 아마 수많은 프레임들이 당신에게 'A=B'공식을 적용하려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기에 자신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자신의 안으로 자존 기준점을 끌고 와야 한다.

 거친 풍랑 속 자신의 올곧은 신념을 등대로 삼고, 자존(自尊)으로 빛나는 한 척의 배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뭐,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름의 방향성을 가지고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는 내가 참

예쁘다.

  

뜬금없지만 자존감 찾는 데 위로가 됐던 BTS의 띵곡 Love Myse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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