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 쓰는 요양보호사입니다

요양보호사,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심했다

by 김경화

오늘은 야간근무 하는 날이라서 여유가 있는 하루이다. 야간인 만큼 하루 종일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집에 일도 할 수 있고 자녀를 돌볼 수 있다. 토요일이라서 아이들은 집에 놀고 있다. 아이들이 늦잠을 자는 시간 나는 독서를 하고 필사하면서 마음을 조용히 한다. 요양보호사인 내가 요양보호사를 주제로 책 쓰기를 하고자 하면서 여러 고민 한다. 과연 요양보호사 일을 어디까지 들어내야 할지, 어떻게 목차의 내용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쓸 것인지 생각하고 있다. 지금 요양 보호 사일을 한지 3년 차 되어가니 업무에도 익숙하고 야간에 혼자 어르신 11명을 돌보는 것도 비교적 잘 돌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기에 더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처음 요양보호사 일을 할 때를 생각하며 어처구니없는 자신에 웃어보기도 한다.

처음에 요양보호사를 하게 된 계기는 뉴스에서 고령화 문제를 심각히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요양보호사를 하면 오랜 나이까지 일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 요양보호사 공부를 할 때 나는 30대 후반이었는데, 시니어를 위한 비전을 보았지만 헤지 부지하게 학원 공부를 완성하지 못하였고 그대로 포기하였다. 그리고 다시 3년 뒤에 나는 40대 초반에 요양보호사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되었다. 한 달간 하루 8시간씩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였다. 그렇게 한 달 공부한 후 국가고시 시험을 치고 자격합격이 되어 자격증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자격증 받고 바로 요양원에 취직하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어르신들 돌봄의 기본도 잘 몰랐다. 처음에 선배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매한가지 일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다. 나는 그의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책임감 느끼고 다른 사람의 뒤처리를 잘 해내는지도 의아했다. 나는 더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선생님은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방에 누가 대변 보셨는지조차도 다 알았고 우선순위를 정해 한 사람씩 보살펴 갔다. 당연히 급한 어르신 먼저 돌봐드리는 것이다. 선배가 하는 일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몇 번을 가르쳐주신 후 나도 혼자 단독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책으로 공부할 때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치니 아무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어려웠다.

기저귀 케어도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 케어 하는 것이 달랐다. 눈으로 볼 때는 기저귀 캐어 기본은 잘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해서 어르신들 배설물이 밖으로 흘렀다. 분명 선배가 가르쳐준 대로 한다고 했는데 왜 흘러넘치는지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선배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이해해 주었지만, 실수가 잦아지니 선생님들끼리 수군거리고 눈치를 주기 시작했고 야단도 많이 받았다. 주간이나 야간이나 교대 시에 특히 더 꼼꼼히 기저귀 관리를 해야 했다. 교대 후 다른 선생님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눈치를 봐가면서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점점 익숙하여졌다. 기저귀 관리뿐만 뿐만 아니라 휠체어 사용, 그리고 식사 수발, 양치 캐어 등 여러 면에서 조금씩 익혀지고 점점 하는 일은 쉬워졌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항상 뒷정리를 잘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다른 일이 바빠도 손에 하던 일은 바로바로 처리하여 어르신들의 불편함을 해결해 드려야 한다. 나 혼자만 일하는 것이 아니기에 편한 대로만 할 수 없다. 뒤에 교대 받는 사람까지 배려 해야 한다. 배울 때는 항상 어렵고 힘들다. 그때는 배우는 욕구 때문에 선배가 어떻게 말하더라도 다 이해가 되고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르신 돌보면서 나의 책임이고 나의 문제 때문에 일이 어렵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마음은 점점 나를 힘들게 한다. 40대 나이에 요양보호사를 하는 사람이 얼마 없다. 대부분 선생님은 50대 중후반 60대 초, 중반이다. 반백 년 인생을 사신 분들이라서 인생 경험도 많고 또 한 직장에서 듬직하게 몇 년, 10년씩 일을 한다. 그러나 나는 40대 초반이라서 선배들께 야단맞고 할 때는 항상 ‘요양보호사가 아니면 못사나?’ 하는 무책임함도 있었고 항상 다른 직장을 갈 생각도 했다. 다른 직장 가봐야 윗선에서 주는 스트레스는 여전히 많을 것이고 직장 내 텃세도 셌다. 그래도 요양보호사들이 나름대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갖고 있기에 다른 직장보다는 덜 스트레스 받는다. 또 40대 나이에 직장 가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이다. 마땅한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잘하는 일도 없다. 게다가 직장에 어린 사람들 많아서 어린 사람 한데 야단맞을 확률도 더 높다. 이 직장, 저 직장 다니면서 한곳에 진드기 있지 못하고 살림에 도움이 안 되는 것까지 생각하니 요양보호사로 배수진을 치기로 했다. 요양보호사 아니면 다른 직장은 가지도 말자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책임한 초보 요양보호사는 점점 자기 일에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고 업무능력도 점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선배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선배들과 비슷할 정도 케어를 잘할 수 있다. 하면서 주 5일 근무에 익숙해졌고 주야간 2교대인 경우는 2~3일 주간 2일 야간, 또 2일 쉬는 일이 점점 몸에 익었고 나름 즐기기도 한다. 직장인은 일주일 동안 5~6일 주간 또는 야근해야 하기에 그 시간이 꼭 직장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상으로 심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 그냥 보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그러면서 자신이 요양원 일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을 적기도 하고 스트레스받는 일도 끄적끄적 적어놓는다.

기억에 남는 한 일이 있다. 한 어르신이 천식이고 폐렴을 알았다. 그 어르신은 코에 영양관 튜브를 하셨는데 그 당시 가래가 많이 끓었다. 주간이든 야간이든 선생님들이 늘 가래 제거하기 위해 흡입하여 드렸다. 나도 야간 근무하는 날인데 2명이 야간근무를 하였다. 한 선생님이 먼저 초저녁 근무를 하고 나는 먼저 자는 타임이다. 자려고 막 누웠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고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그 어르신은 식은 땀 흘리면서 아주 괴로워했다. 나는 아래층에 계시는 선임 선생님을 불렀다. 그리고 급히 혈압 재고 체온 재고 했다. 그 당시 산소포화도를 재는 것을 잊었다. 선임 선생님도 당황하여 잘 몰랐고 나도 신입이기에 잘 몰랐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나는 어르신의 손을 잡아주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 했다. 내 손을 잡은 어르신은 얼마나 꽉 잡았는지 손에 상처가 날 정도로 꽉 잡았다. 다른 선생님은 시설장님과 간호 팀장님께 보고하고 계셨다. 어르신이 말씀 못 하시기에 몇십 분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가 어르신 의식이 돌아오고 크게 지르던 고함도 잠잠해졌다. 그날 밤 어르신은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야간을 마쳤고 쉬는 날이 되었다. 그 어르신은 그다음 날에도 응급실에 가셨고 퇴원하면서 다른 요양시설로 옮기셨다. 그때 나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마음이 아팠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어서 어르신 더 잘 보살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어르신 운명은 그날 갈 사람이 아니었기에 가지 않았지만, 그 뒤로 나는 산소포화도 체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르신이 위독한지 아닌지 그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요양병원이나 더 큰 요양원 같으면 전문 의사나 간호사가 있어서 그분들의 담당이지만 작은 요양시설은 요양보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보살필 뿐 의료진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한테 맡겨진 일들을 자부심을 느끼고 해낼 수 있다.

병원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요양원에 오는 일도 있다. 한 남자 어르신은 폐결핵 환자셨다. 우리 요양원에 오실 때 기침하시면 피를 토하셨다. 기저귀는 하지 않으셨고 인지도 있으셨지만, 그는 병원에서 포기하고 이제 마지막을 기다리는 어르신이다. 우리 요양원에 오셔서 일주일인가? 10일인가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마지막 시간을 우리 시설에서 정성껏 돌봐드렸고 그 어르신은 편하게 돌아가셨다. 이런 일들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우리 요양보호사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정성껏 보살피기에 그들이 편안한 맘으로 마지막을 보낸다는 사실은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이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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