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화요일 일기
어제 서울을 벗어나 인천으로 가는 길에 엄청난 풍경을 보게 되었다. 미세먼지와 황사가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선명한 푸른색과 녹색이 조화롭게 뒤섞인 자연을. 몇 년 만에 이런 풍경을 보게 되었는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라서 순간 눈물이 찔끔 났다. 코로나 19로 포기한 것이 많지만, 한 편으로는 돌아온 것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19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이런 풍경을 보지 못하겠지.
좋은 곳에 취업을 했다. 그럼에도 잡다한 것들이 걸려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조금씩 노력했다. 크게 노력하면 상사의 눈에 띄니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노력해서 사무환경을 나에게 맞춰 바꿔 나갔다. 그런데 의자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책상과 의자의 높낮이가 맞지 않아서 뒷목과 어깨가 작살난 지경이었다. 의자는 높낮이가 조절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요가 선생님이 내 어깨를 보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왔다. 내가 막일라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보통의 사무직이라고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선생님의 모습에 슬픔이 밀려왔다.
해결을 위해 방석을 깔고, 등받이를 설치하고, 쿠션을 품에 안고 앉자 괜찮아졌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등받이와 쿠션을 구매하는데 적지 않은 돈이 들었고, 높낮이 조절되는 의자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가 상사의 눈총을 사야 했다. 쿠션은 그를 해결하기 위해 상사가 난 해결책이었다. 문제는 이 의자 하나에 앉기 위해 3가지 물품이 필요하다 보니 보는 사람도 놀라고 앉아서 일하는 나도 부담스러워 죽겠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앉고 일어나기 위해 번거로운 동작을 취해야 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을 접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 마음속의 자본주의 여신은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을 눈 깜짝할 사이 쳐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등받이 높이를 내 등 높이에 맞춰 조절하고 방석 위에 앉았다. 이제는 없으면 허전한 쿠션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뭐, 어때.'
그러자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순간 눈이 뒤집혀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나만의 패턴을 찾아가며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의자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일터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단순 가면서도 명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어제 파랗다 못해 새파란 하늘을 보며 눈물이 났다.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지구 상에서 하나 존재한다면, 내가 생활하는 환경에 대한 것이다. 미세먼지, 황사로 인해 벗을 수 없는 마스크, 미세 플라스틱이 떠다니며 방사능 수치가 얼마나 될지 모르는 바다까지. 코로나 19는 우리의 일상에서 많은 것을 가져갔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 청량감이 넘치는 풍경을 얻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이 상황에 배반되는 사람이 되는 걸까? 어제의 풍경을 보면서 코로나 19가 중국에서 퍼져서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환자들과 전선에서 싸우는 의료진들에게 원망을 듣게 될까?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황사에 대해 배워왔고, 성인이 되고 자연스레 미세먼지를 접하면서 파란 하늘을 잃어버린 내 삶에서 '진작에 좀 이러지'라는 생각을 한다면, 나는 나쁜 사람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