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것도 싫고, 어디를 둘러봐도 나뭇잎 하나 없이 휑하고 을씨년스러운 것도 못마땅하다. 겨울은 추워야 좋은 거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지 않나. 겨울이 나한테는 그렇다. 미안하지만 그냥 그렇다.
1, 2월의 겨울에 비하면 12월의 겨울은 겨울도 아닌 거였다. 동면을 해야 한다느니, 불멍이라도 하면서 술로 버텨야 한다느니 온갖 방정을 떨며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12월은 버틸만했다. 기온도 지금처럼 낮지 않았고, 바람도 지금처럼 매섭지 않았다. 1월 중순인 지금은 투덜거릴 힘도 없다.
그래도 명색이 어른인데 꺼져만 가는 기분을 자꾸 계절 탓으로 돌리기에는 자존심이 조금 상한다. 무언가라도 해보자. 이것저것 궁리를 하다가 문득 얼어버린 마음도 녹일겸 출근하면 바로 커피를 내려 마시기로 했다. 커피는 남편 담당이라 보통은 아침에 남편이 주는 대로 대충 마시고 출근을 하는데 나는 힘든 겨울을 버텨야 하니 과감히 아침 루틴을 바꾸기로 했다. 마침 카페를 하는 언니가 이전에 준 드립퍼도 있고 부엌 수납장에서 찾은 종이필터도 있어서 다소 흥분된 마음으로 카페에 들러 언니에게 핸드드립으로 커피 내리는 법도 다시 배웠다.
소확행이 이런 것인가? 확실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소한 만족을 주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물에 젖은 솜뭉치 같은 몸을 이끌고 열두 겹은 끼워 입는 것 같은 느낌으로 겨울 옷들을 입으며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도착해서 커피를 내려 마실 생각을 하면 약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벌써 몇 번이나 내려 마셨는데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이다. 다시 카페에 들러 언니가 커피 내리는 것을 또 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필터는 드립퍼에 비해 턱없이 작은 사이즈였던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무언가 억울했다. 누구한테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짜증이 났다. 사이즈가 넉넉한 필터에 향이 좋은 커피를 우아하게 떨구어기분 좋게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려마시는 것이 나한테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인 것일까. 마치 온 우주가 힘을 모아 나를 놀리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문제가 생겼고, 그 문제의 원인도 알고 있고 해결방법도 간단하다. 필터를 당근 마켓으로 나누던지 (사실 저렇게 작은 사이즈의 드립퍼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냥 버리던지 한 후에 맞는 사이즈를 사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귀찮으면 일단 그냥 두고 새 필터만 사면 되지.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이보다 더한 일도 겪은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짜증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울고 불고 보채서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 딱 한입 먹었는데 땅에 떨어뜨려 버린 그런 느낌이다. 아이처럼 주저앉아 통곡을 하는 대신 삐딱한 오기가 생겼다. 가지고 있는 필터를 다 쓸 때까지 그냥 이렇게 매일 커피를 마셔버릴 테다.남아있는 필터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이렇게 쭉 고집을 부린다면 딱 3월 12일에 필터를 다 쓰게 된다. 찾아보니 올해는 3월 5일이 경칩이라고 한다. 삼라만상이 겨울잠에서 깨는 시기라고 하니 경칩도 지난 3월 12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봄이겠지.
그래 이렇게라도 버텨보자. 희망으로 버티던 오기로 버티던 겨울만 버텨내면 되는 거지. 모닝커피에 커피가루가 조금 씹히는 것이 대수랴. 3월 5일에 개구리들과 함께 기쁘게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면 이렇게 삐딱하게라도 버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