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장 ~ 2장
어제저녁 8시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다. 저녁식사를 먹고 교회에 일찍 가서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아내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나는 오늘 택배로 배달된 책을 가지고 가서 읽었다. 피아노가 간절히 배우고 싶었던 아내는, 얼마 전부터 고모 지인이신 어느 교회 사모님의 재능기부로 매주 토요일 주 1회 피아노를 배우느라, 매일 같이 시간을 내서 나와 같이 교회에 가서 피아노 연습을 열심히 한다. 에미마가 피아노를 연습하는 동안에,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대가로 서평단으로부터 무료로 제공받은 책을 읽었다.
10대 청소년 시절 나는 학교에서 교회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처럼 선교사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았다. 20대 때는 여전히 교회 주변을 맴돌았지만, 나일롱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었다. 30대 때는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목사님이신 아버지와 사모님이신 어머니를 위해서 교회는 다녀드렸다.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 에미마와 결혼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를 다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기독교와 교회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수요예배는 어느 예배와 같이 찬양으로 시작한다. 피아노 반주자가 없는 우리 교회는 반주기를 틀어 놓고 찬양을 한다. 노래방 기기처럼 교회에서 쓰는 찬송가 반주기가 있다. 찬송이 끝난 후에 목사님께서 설교 말씀을 전하신다. 그리고 성경의 한 부분을 성도들이 함께 읽는다. 함께 읽은 성경 본문 가운데 감동된 은혜를 나눈다. 그 후에 서로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한다. 우리 교회 수요예배는 이렇게 드린다.
성경을 같이 읽는데 내 생각은 잠시 딴 데 가 있었다. 아내를 만난 이후에 나는 다시 기독교와 교회를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억지로 다닌 것이 아닌 스스로 다니는 것이 되었지만, 여전히 주일 오전 예배뿐 아니라 평일 저녁 8시에도 ZOOM 화상채팅 앱으로 성경 읽기 모임을 하고, 수요예배도 드리고, 이런 것들이 무겁게 느껴진다.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는 좋은데, 그 종교가 너무 무겁다. 그렇지만 이걸 개혁한다고 가볍게 만들면, 더 이상 기독교는 지금의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이고, 거기에서 이 종교의 파워가 나온다.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성에 장사되니 (열왕기상 2:10)
딴생각을 하다가 성도들이 함께 이 구절을 읽고 있을 때 생각이 다시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 왕 다윗이 죽었다. 다윗이 죽는 순간부터, 나는 성도들이 함께 읽고 있는 본문으로 돌아와 같이 성경을 읽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윗이 죽자마자, 다윗의 배다른 형제인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친모 밧세바를 찾아온다. 아도니야도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아들인데,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이고, 아도니야는 학깃의 아들이다. 밧세바는 다윗과 살기 전에 우리아의 아내였다. 장군 우리아가 전쟁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 동안에, 절세미인이었던 밧세바는 자기 집 마당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고, 왕궁의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다윗은 절세미인 밧세바의 벗은 몸을 보았다. 다윗이 어쩌다 밧세바의 벗은 몸을 본 게 아니라 이스라엘에 절세미인으로 소문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집을 일부러 내려다보며 관음 했을지, 밧세바 또한 어쩌다 목욕하는 장면을 다윗왕에게 보인 것이 아니라 다윗왕이 보이는 그곳에서 홀랑 벗고 샤워를 했는지 모른다. 절세미인 밧세바에게 욕정을 느낀 다윗왕은 밧세바와 사랑을 나눈다. 장군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전쟁에 나가 있는데, 밧세바가 임신을 한 것이다.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윗왕은 우리아가 휴가 차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서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술을 먹였다. 집으로 돌아가서 밧세바랑 자라고 술을 먹였는데, 우리아가 어떻게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맛있는 것을 먹고 술을 마시고 아내랑 자냐고 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충성심을 보였다. 불타는 성욕을 컨트롤할 만큼 왕과 왕국에 대한 충성심에 불타는 장군이었는지, 아니면 소문을 들어 이미 경국지색 절세미인 아내 밧세바랑 다윗왕과 그렇고 그런 사이를 알고 있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지만 말이다. 다윗왕은 이걸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곁에 있는 간신배에 모략에 따라 최전선으로 보내 버린다.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지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보내 버린다. 나는 충신인 장군의 아내를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이해한다. 왕이 장군의 아내를 탐할 수도 있지. 장군과 만나 담판을 짓고, 이혼시키고, 장군에게 돈과 지위를 주고 자기 사람을 만들고, 장군의 아내를 자기 아내 삼아 살던가. 아니면 장군에게 내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키워 달라고 하고, 밧세바를 우리아에게 돌려보내던지 말이다. 왕의 주변에는 다른 예쁜 여인들도 많았을 테고 말이다. 다윗 왕의 치명적인 죄는 남의 아내를 탐한 것보다도,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싸우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지로 보내버린 것이다. 물론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며 직접 보내버린 것은 아니고, 중간에 간신배의 과잉충성이 있었지만 말이다. 불륜의 자식이 솔로몬이었던 것은 아니고, 불륜의 씨앗인 아들은 아파서 죽었다. 다윗은 아들이 아파서 열이 팔팔 끓고 숨이 꼴딱꼴딱 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면서 입에 물과 음식을 대지 않고 금식기도를 하다가, 아들이 죽자마자 깨끗이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고 재수 없는 일들을 털어 버리고 왕으로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 후에 밧세바랑 사랑을 나누고 얻은 자식이 솔로몬이었고, 그 솔로몬을 왕위 후계자로 삼았던 것이다. 왕의 배다른 자식이 여럿 있다 보니까, 배 다른 자식들 간의 왕위 쟁탈전이 심했던 것 같다. 압살롬과 아도니야가 그 대표이다.
다윗이 죽자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친모를 찾아온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내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데, 솔로몬이 왕을 가져갔으니 내가 인정하겠다, 대신에 왕에게 말씀드려 수넴 여인 아비삭을 주어 아내를 삼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왕좌의 게임에서 실패한 배다른 다른 왕자가, 예쁜 여자 하나를 달라는 게 뭐 큰 문제냐 하겠지만, 수넴 여인 아비삭이 누구냐를 알면, 아도니야 이 친구가 지 목숨을 도살장에 가져가는 어리석은 위인이라 할 수 있다.
아비삭이 누구냐를 알려면, 열왕기상 1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윗왕이 나이가 많이 늙어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이불을 많이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그때 주변에 간신배 신하들이 한다고 한 짓이, 온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예쁜 남자를 못한 처녀를 찾아다가 왕에게 데려왔다. 이불 대신에 따뜻하게 품고 자라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왔다 갔다 하며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다윗왕에게 이스라엘에서 예쁜 처녀 하나를 찾아서 데려다 놓은 것이다. 늙은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신하들이 배다른 왕좌들에 붙어서 왕위쟁탈전에 하기 위해 숨이 다해가는 왕의 눈을 가리려고 이스라엘 최고의 예쁘고 어린 처녀 아비삭을 데려다가 왕에게 품고 자라고 왕에 옆에 놓은 것이다. 심히 아리따웠다고 기록되는 아비삭은 다윗왕을 간병했지만, 다윗왕은 아비삭과 자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세상 뜰 날을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아무리 아무리 예쁘고 예쁜 절세미인이 옆에 있다고 하여 뭐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서 똥오줌 싸면 옆에서 닦아 주어져야 하는 처지인데,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침은 꼴딱꼴딱 넘어가고 질질 흐르나, 남자의 심볼이 서지 않는데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회한 왕의 눈으로만 아리따운 처녀의 몸을 훑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선을 현대인의 전문용어로 시선 강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처녀 아비삭은 시선 강간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숨이 꼴딱꼴딱하는 세상 뜨기 직전에 할아버지라도, 전설적인 왕이고 아리따운 처녀가 보기에도 노 와이 섹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비삭이 아리땁다고 하지만, 귀족의 딸 규수를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비삭을 데리고 오면서 아비삭과 아비삭의 가족에게 많은 돈을 주었을 것이고, 아비삭과 그녀의 가족들도 신분상승을 했을 것이다. 왕비가 된 것은 아니지만, 왕의 여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왕자의 난에서 지고 목숨만 부지하여 자기 집에 짱 박혀서 조용히 자택연금 상태에 있어야 할 아도니야가 다윗왕의 왕비이자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를 찾아와서 다윗왕의 여자였던 아비삭을 달라는 것이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솔로몬에게 가서 바로 이 부탁을 전하고, 솔로몬은 호위무사 브냐야를 보내 아도니야의 목을 바로 따 버린다. 왕위 계승자인 솔로몬을 제치고 왕위쟁탈전을 하다가 실패하고, 대신에 목숨만 부지한 것만으로도 감지해야 할 위인이, 솔로몬에게 아버지 다윗왕의 여자를 달라는 게 죽으려고 용을 쓴 것이다.
아도니야는 아주 잘 생기고 인물이었던 것 같다. 자라면서 다윗왕에게 한 번도 혼나거나 싫을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자랐다. 다윗왕의 측근인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여 반란을 모의하였다. 다윗왕이 누워서 세상 뜰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도니야는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을 준비하고 솔로몬과 솔로몬의 측근을 제외한 다윗의 다른 배다른 아들들과 신하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다. 이를 솔로몬의 측근들이 파악하고, 다윗왕에게 보고하여, 다윗 이름으로 솔로몬에게 왕위 계승 기름을 부어 다윗이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왕위를 정식을 계승하고, 반란군은 진압되었다. 반란군에 주동자였던 왕자 아도니야와 장군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은, 용서를 받아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선대왕 다윗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냥 목숨만 붙여 놓은 것이지, 솔로몬은 하나의 잘못만 더 나와도 바로 목을 댕강 자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아비아달이 다윗왕이 죽자마자 다윗왕의 왕비이지 새 왕 솔로몬 왕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와서 한다는 부탁이, 선대왕 다윗왕의 젊은 여자 아비삭을 달라는 것이었다. 밧세바는 이 말을 솔로몬에게 그대로 전했지만, 밧세바 또한 아비삭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이 늙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때, 이불 대신 껴안고 자라고 신하들이 온 이스라엘을 뒤져서 찾아온 절세미인 아비삭에게 밧세바는 질투 내지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다윗이 아비삭과 자지 않았지만, 밧세바는 다윗이 아비삭과 자지 않은 게 아니라 자지 못한 것이고, 침대에 누워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할아버지 다윗왕이 아비삭을 시선으로 훑으며 침을 흘리는 비릿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전설의 노왕 곁에서 교태를 부리는 아비삭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아도니야에게 밧세바는 계모였을 것이고, 밧세바에게 아도니야는 남편의 아들이었으니 아들이나 마당치 않은 아들인데, 그 아도니야가 못마땅한 남편의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취하고 싶다 했을 때 옳다구나 했을 것이다.
이미 솔로몬에게 왕권이 넘어가 혁명에 실패한 아도니야는, 집에서 조용히 살면서 솔로몬에게 딸랑딸랑하면서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평생 석고대죄하면서 살아도 목숨을 부지할까 말까인데, 그때 다윗왕의 아버지의 여자 아비삭에게 욕정을 느꼈다가 지 목이 날아가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아도니야가 숙청된 후에, 반란 주동자인 장군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도 제거당한다.
한동안은 부모님과 아내에 끌려 다니면서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교회에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면서, 예배 가운데 성경을 읽을 때, 작가를 지망하는 내가 다른 책을 읽고 리뷰를 하듯이, 그렇게 성경을 읽고 리뷰를 할 글감을 찾는 마음으로 기독교 종교활동에 참여한다.
그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열왕기상 1장 5절 ~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