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형도 아기가 태어나면 돈이 많이 필요하고, 나도 스타트업을 시작해서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 회사에 와서 일할래?"
2021년 1월 말이었다. 실용음악연습실 7개 점포를 무인으로 혼자서 운영하던 동생이 회사를 확장하여 공유오피스를 운영하고 앱을 만드는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나는 2020년 상반기에 국비지원 직업훈련으로 출판편집디자인 과정을 이수했다. 열심히 성실히 교육에 참여했고 그 분야의 기능은 익혔지만, 이력서를 뿌려도 면접을 보러 오라는 데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2021년 1월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 요한이가 생겼다. 동생도 직원을 둘 때가 되었고, 나를 불렀다.
2000년 스무 살 조울증에 걸려 20년 가까이 방황했다. 조울증은 골 때리는 정신질환이지만, 병원에 꾸준히 다니며 약을 잘 먹으면 괜찮다. 별 일 없이 산다. 그게 쉽지는 않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조울러들은 자의적으로 약을 먹다 끊으며 재발을 반복한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아내 에미마랑 결혼도 하고 아들 요한이도 태어나고 조울증을 극복했지만, 경력 단절과 커리어 공백으로 변변한 직장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쪽으로 취업을 할 생각을 가지고 출판편집디자인 과정을 들은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를 따라 귀농을 해 왕대추 농사를 했었는데. 평생 농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귀농보다 귀촌이었다. 아침에 잠깐 농장에 있고, 해가 뜨거운 한낮과 해가 진 한밤에 노트북 앞에 앉아 책 한 권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생각이었다. 사랑 때문에 조울증에 걸린 이야기, 사랑 때문에 조울증을 극복한 이야기, 백수에서 작가가 되어가는 이야기. 나만이 쓸 수 있는 글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었다.
시골에 더 있다가는 평생 농부로 코가 꿰일 같았다. 직업훈련 교육을 받으며 그 기간 동안 책을 써서 작가가 되려고 했다. 하루 8시간 주 5일 교육을 받으며 글을 쓰기는 어려웠다. 교육 내용이 재미있어 충실하게 참여했기 때문에 여유도 없었다. 교육을 받고 나니 그 분야로 취업 희망도 생겼다. 기능은 익혔지만 경쟁을 이기고 취업에 이르지는 못했다. 출판편집 디자인을 선택한 것이 국가기간산업 과제라 자비 부담 없는 전액 무료이기도 했지만, 1인출판사를 설립해서 내 책을 내며 살 생각도 있었다.
"응."
취업 교육을 받고 나니 취업 의지도 생겼다. 이력서를 뿌렸으나 면접 보라고 연락 오는 데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동생이 불렀다. 그 상황에서 "응." 외에 다른 답을 할 수 없었다. 취업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절실함이 있었던 것이지, 어떤 직업으로 취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글을 쓰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에서 2년 반동안 일했다. 나에게는 감사한 제안이었다. 이 나이에 신입으로 어디 가서 일할 때가 마땅치 않다.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돈은 상관이 없었다. 최저임금도 괜찮았다. 지금은 상관있고, 안 괜찮다. 물론, 지금 어디 가서 새로 일을 시작해도 최저임금 수준부터 시작한다는 현실 파악은 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도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황폐화된 출판 시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와중에도 백만 권이 팔리는 밀리언셀러 작가들이 있다. 내가 그런 작가가 되면 되니까 그게 내 생각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좋을 때도 좋지 않을 때도 있다. 동생이 굳이 나를 고용할 필요는 없었다. 나 아니면 내가 했던 일을 할 다른 사람도 없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족 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것저것 아무거나 다 하는 일이 그렇다. 중소기업 가족회사의 비가족 직원이 느끼는 불만사항도 있다고 하는데, 가족회사의 가족 직원도 애로사항이 있다. 다른 직원에게 내가 대표의 형이라는 것을 오픈하지도 않았다. 다른 직원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나는 모른다. 알든 모르든 가족회사에 다니며 덕을 본 것은 없다. 다닐 회사가 없었는데 불러 준 것 외에는 말이다. 만약 그때 거기 계속 있었으면 회사가 망하지 않는 이상 평생 다닐 수 있었던 것 외에는 말이다.
만약에 그때로 돌아간다면, 회사에 계속 다닐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동생이 다시 나를 부른다면 가지 않을 것이다. 회사가 신촌이라 수원 집에서 너무 멀었다는 것이 나의 퇴사의 공식적인 이유다. 또 동생도 한때 10명이 조금 넘는 직원을 거느렸지만, 지금은 다시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를 위해서도 동생을 위해서도 내가 회사를 떠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동생이 나를 불렀을 때 "응."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게 맞았다.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집 대신 부산 해운대에 갔고, 그렇게 동생 회사를 떠났다. 그때는 또 그게 맞았다. 지금 나는 구직활동을 하며, 아들 요한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도서관에 와 책 읽고 글 쓰고, 요한이를 데리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