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스타트업에서 나의 직함은 매니저였다. 직무는 업무지원과 디자인이었다. 나의 디자인은 업무지원의 한 부분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업무지원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업무보조였다. 작은 회사라 대표인 동생 말고 다른 직원은 따로 직급이 없었다.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 그런 직함이 전부였다. 대표와 직원 사이 관리자라기보다 서포터에 가까웠다. 경영진도 아니고 일반 사원도 아니었다. 회사 밖에서는 동생의 형이었지만, 회사에서는 동생의 직원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회사에서 대외적으로는 동생을 사장님으로 모시지만, 동생 일 돕는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러면 일이 쉬웠을 것이다.
내가 했던 일을 한 단어로 말하면 업무보조가 가장 적확하다. 아무거나 다 했다. 개발자 일 빼고는 다 했다. 그건 내가 못 했다. 유튜브 영상 업로드는 내가 했지만, 영상 제작은 안 했다. 그걸 하는 직원이 따로 있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손을 안 댔다. 동생이 원하는 퀄리티로 그 일을 하려면 퇴근 후 따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공부라는 게 학원 다니고 인강 듣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관련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는 것조차 퇴근 후에는 싫었다. 시키는 것은 다 했지만, 출근할 때 회사에 로그인해서 퇴근할 때 로그아웃하고 싶었다.
아침에 음악연습실을 돌아보고 출근했다. 돌아본다는 게 주로 청소와 쓰레기 분리수거다. 비가 와 물이 새면 그걸 퍼내고, 바퀴벌레가 나오면 바퀴약을 사다가 바른다. 회사 레스토랑에서 점심 피크타임 동안 주방보조를 한다. 주로 홀과 배달 세팅을 한다. 점심을 먹고 사무를 보고 디자인을 한다. 우체국도 다녀오고, 다이소도 다녀온다. 정부 지원사업을 위한 사업계획서를 쓰고 카탈로그를 만들고 PPT를 만든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현수막을 만들고, 디지털 사이니지 메뉴판을 만들고, 회사 앱 디자인을 한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홍반장 같은 역할이었다. 나는 박학다식 다재다능보다는 잡학다식 '찢어진 백과사전'이다.
결국 돌아보면 모든 일은 대표인 동생이 다 하는데, 내 일은 동생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힘들었던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하다 보니 내가 퇴사할 때 그런 일을 다 하고 있었지 처음부터 그런 일을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매니저였다. 퇴사할 때 즈음 매니저로서 하는 일이 그랬다. 어차피 같은 시간 출근해서 같은 시간 퇴근하고, 어쩌다 특별한 일 있을 때 야근이 있었던 거니, 생각하기 나름이다. 어디까지나 그때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했겠다 싶은 거지, 지금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건 나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다.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모든 문제는 내 문제였다. 내 생각이 콩밭에 가 있었다.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내 생각은 온통 글 쓰는데 가 있다. 바쁜 일상 속에 살아갈 때가 놀 때보다 더 양질의 글을 쓰기도 한다. 내가 자기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시킨 일 정해진 일은 농땡이 부리지는 않는다. 부모님으로 받은 천성 DNA가 그렇다. 자기관리가 안 돼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메여 있지 않으면 그냥 세월아 네월아 논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건 나의 뇌가 스트레스에 취약하여 스스로 작은 쾌락들에 중독되어 쉬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임감이 필요한 이 나이에 그런 방식의 쉼은 좋지 않다.
글은 써야 하고, 일은 해야 하고, 집에서는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해야 하니, 내가 뻑이 갔다. 글과 일은 문제가 없었다. 잘 돌아갔다. 아내는 내가 안 하던 일을 가정을 위해 하니 참았을 테고, 아들은 막 태어난 아기였으니 이래도 저래도 좋았을 테다. 정신이 가 있는 콩밭은 글인데, 다른 여러 역할이 있으니, 내 정신이 뻑이 갔다. 조울증이 재발한 것은 아니었다. 조울증을 평생 약으로 눌러 관리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이렇게 가면 조울증이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다.
집 가까운 곳에서 적당한 다른 일을 알아보려고 했었다. 그게 이 나이에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일단 하던 일 계속하면서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다 잡았는데. 가뜩이나 바쁘고 정신이 없던 날에 동생이 평소에 안 했던 해본 적도 없던 일을 시켰다. 동생은 간단하게 하라는 말이었는데, 나는 복잡하게 하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연습실 환풍구 먼지를 닦으라는 것이었는데. 동생은 밖에서 보이는 것만 닦으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환풍구를 뜯어 속 안 먼지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럴 수 있게 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억지로 껌과 호치케스로 고정시켜 둔 것이었다.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던 시간에 먼지 낀 환풍구와 씨름하다 거기서 퇴근했을 때 바로 집 대신 부산 해운대에 가기로 했던 것은 아니다. 노트북을 열어 그날까지 써야 할 북리뷰가 있었다. 출판사에서 공짜로 제공받아 리뷰를 써야 하는 마감일이었다. 근처 카페에 갔다. 1시간 동안 리뷰를 쓰고 노트북을 닫았다. 집에 들어갔다 자고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스마트폰을 끄고,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고, 수서역에서 SRT를 타고, 부산역에서 부산 지하철을 타고 부산 해운대에 갔다.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