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마음속에 사직서 한 장을 품고 다녔다.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다. '마음속에' 사직서를 썼다는 것이지. 종이에 손글씨로 쓰거나, 컴퓨터 워드 프로그램에 타이핑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늘 퇴사를 생각했지만, 계획 아래 준비된 퇴사는 아니었다. 퇴근을 하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집에 들어가야 했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부산 해운대에 가기로 했다. ATM에서 현금을 찾고, 스마트폰을 껐다. 수서역에서 부산행 SRT를 탔다. 답을 가지고 해운대에 갔던 것은 아니다. 답을 찾아서 갔다.
스무 살 조울증에 걸렸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나서야 조울증을 극복했다. 조울증을 극복했다는 것이 약을 끊고 완치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울증의 세계에 그런 달달한 것은 없다. 꾸준히 병원에 다니며 매일 약을 먹으며 기분을 조절하여 별 일 없이 산다. 아내 에미마와 가정을 이루고, 아들 요한이가 생겼다. 조울증이 재발한 것은 아닌데, 이렇게 가다가 재발할 수 있겠다 싶었다.
퇴근 후 집 대신 부산 해운대에 갔고, 다음날 출근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퇴사를 하고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스무 살에 조울증에 걸리고, 한계에 부딪히면 본능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왔던 방식이다. 더 이상 그런 방식을 쓰면 안 된다. 그런 방법은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파산신청을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든 정리가 되지만 다시 어렵게 쌓아온 얼마 되지 않는 신용을 또다시 잃어버린다.
부산 해운대에서 더 이상 어떤 직장도 다니지 않기로 했다. 내 평생에 하고 싶은 한 가지 일이 있다. 글 쓰는 일이다. 내가 회사에 다니는 일은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것 외에 의미가 없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고. 그 숭고한 밥벌이 하나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도 세상에도 의미가 있다. 회사를 다니는 것은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것이지, 내가 의미 있는 돈을 벌 수 있는 방편도 아니다. 글을 써야지 돈을 벌 것 같다. 작금의 황폐한 출판계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글 써서 돈 버는 극소수의 작가가 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언어의 온도》로 백만 부를 돌파한 이기주 작가가 있다.
일단 책을 한 권 쓰기로 했다. 책 한 권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좋겠다. 안 되면 두 번째 책을 쓰기로 했다. 책 두 권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좋겠다. 안 되면 세 번째 책을 쓰기로 했다. 백만 권 팔리는 밀리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 쓰기로 했다. 한 권의 책이 백만 권 팔려도 좋고, 내가 쓴 책들의 판매부수가 합쳐서 백만 권 팔려도 좋다. 사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한 달 벌어 한 달 살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며,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질병으로 인한 실업급여를 신청해 보라는 동생의 조언을 받았다. 원래 실업급여를 탈 생각은 없었지만. 작가가 될 시간을 벌기 위해 실업급여를 받으며 국비지원 직업훈련으로 영상편집을 배우기로 했다. 영상편집 기술이 작가활동 하는데 유용한 기술일 수도 있다 생각했다. 질병으로 인한 실업급여 신청 절차를 밟는데 3개월이 지나갔고, 최종적으로 탈락했다. 대상이 되지 않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대신, 국민취업지원제도에 신청했다. 저소득층이라 많은 지원을 받는 1유형이 되었다. 국민취업지원제도로 영상편집 교육을 받으려 했다. 시기가 맞지 않았고, 다음 교육이 언제 시작할지 몰랐다. 교육 대신 취업으로 틀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서 주간보호센터에서 3개월 일경험을 했다. 기관의 경영악화로 정규직 전환이 되지 못하고 계약이 종료되었다.
준비된 퇴사는 아니었다. 퇴근하고 다음 날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는 대신, 부산 해운대에 갔고, 출근하지 않았다. 실업급여 신청, 직업훈련 과정 탐색, 구직활동, 일경험 등등. 다시 현실에 눈을 떴던 것은 아니다. 글 써서 책이 나오고 작가가 되기까지 걸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꿈을 꾸는 사람이 꿈을 꾸는 이유는 어떤 이에게는 꿈이 현실보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용센터의 알선을 받아 이력서를 내고 있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는 데는 간혹 있으나, 아직까지는 면접에서 끝났다. 구직활동도 진심이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것도 진심이다. 두 마리 토끼를 쫒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것은 아니다. 두 마리 토끼 중 내가 잡고 싶은 토끼가 있지만, 어떤 토끼든 일단 토끼를 잡아야 한다. 내가 잡고 싶은 토끼를 잡을 때까지.